내일은 한국명절인 설날과 서양명절인 ‘발렌타인 날’이 겹쳤고, 다음날인 월요일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초대)과 아브라함 링컨(16대)을 함께 기리는 연방공휴일이다. 지난달의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일에 이어 올해 두번째 연휴이다.
본국인들은 설이 일요일과 겹쳐 연휴가 3일로 줄었다고 투덜댄다지만 한인들은 손해 볼 게 없다. 미국에선 어차피 설날도, 발렌타인 날도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 분위기 자체가 썰렁하다. ‘구정 맞이,’ ‘설날 잔치’ 따위의 말은 식품점 세일광고에서나 볼 수 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설날 연휴가 당연한 걸로 알지만 10여년 전까지도 설은 엄청 홀대 당했다. 소위 ‘이중과세(二重過歲)’ 논란 탓이다. 세상이 급격히 달라진 지금은 ‘이중과세’를 ‘二重課稅’로 알아듣는 사람이 더 많다. 단일 항목에 세금을 두 번 물린다는 뜻의 경제용어로 무역 당사국 사이에 이를 방지키로 합의하는 협정이 보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과세 시비는 까마득한 옛날인 구한말, 고종황제가 갑오경장의 개혁정책에 따라 1896년부터 양력을 공식력으로 쓴 데서 비롯됐다. 이때부터 1월1일은 ‘陽正(양력설)’ 또는 ‘신정’으로, 전래의 설은 ‘陰正(음력설)’ 또는 ‘구정’으로 불리게 됐는데, 대부분의 백성들은 양정을 ‘서양 오랑캐 명절’이라며 배척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는 여전히 음력설에 드렸다.
설이 설 땅을 잃은 일제 통치기간에도 한국민은 “양력설을 쇠면 친일매국, 음력설을 쇠면 반일애국”이라며 전통명절을 고수했다. 설의 서러움은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한국판 조지 워싱턴인 이승만은 ‘이중과세’란 말을 처음 쓴 장본인이다. 경제부흥을 위해 노는 날을 줄여야한다고 주장했다. 그 경제부흥을 실현한 박정희 역시 기를 쓰고 설을 타박했었다.
거의 90년간 핍박 받아온 설은 전두환 정권(5공) 때인 1985년 ‘민속의 날’이란 엉뚱한 이름으로 햇빛을 봤고, 노태우 정권(6공) 때인 1989년 이윽고 ‘설날’로 복원돼 음력설 전후 3일이 연휴로 지정됐다. 올림픽을 주최한 직후여서 노는 날이 늘어나는 것을 괘념하지 않을 정도로 경제가 호전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음력설 자체의 강인한 생명력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이중과세 시비가 완전히 종식된 건 아니다. 6공에 이은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IMF 환난의 암운이 감돌았던 1994년, 국가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며 이중과세를 폐지하는 쪽으로 공휴일제도 변경을 검토했다가 찬반여론이 엇갈려 유야무야됐다. 놀랍게도 당시 실시된 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8% 이상이 제도변경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었다.
한국 국토해양부는 올해 설 연휴를 포함한 12~16일 기간 중 총 2,546만명(하루 평균 509만명)이 귀향하거나 여행할 것으로 추정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서울-대전이 4시간40분, 서울-부산이 8시간45분, 서울-광주가 7시간 걸릴 것으로 예상된단다. 세배, 차례, 성묘, 널뛰기 등 전통행사보다 고속도로 정체상황이 설의 상징모습이 돼버렸다.
올해는 설날에 발렌타인 날이 겹쳐 한국이 더 부산해질 것 같다. 전통명절보다 수입 서양문물에 더 매력을 느끼는 젊은이들 가운데는 가족과 함께 귀성하기보다 애인과 함께 도피하는 쪽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과일이나 쇠고기 등 제수용품을 파는 업소들이 올해는 엉뚱하게 장미꽃을 파는 꽃집이나 초콜릿을 파는 제과점과 피나는 경쟁을 치르게 됐다.
시애틀지역 한인들에겐 딴 세상 얘기 같다. 꼭 일주일 전 벨뷰의 팩토리아 몰에서 아시아계의 ‘호랑이 설 축제’가 열렸는데 한인들 모습은 극히 드물었다. 중국·일본·베트남은 물론 설을 쇠지 않는 필리핀계도 전통 공연단을 출연시켰지만 한인사회 공연단은 없었다.
한인들이 이중과세를 철저히 배격하는 모양이다. 오늘이 ‘까치설날’임을 아는 한인이 몇이나 될까?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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