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벽해
호랑이 해여서 그런지 세월이 무척 빠르다. 60년만의 백호 띠라며 떠들썩했던 게 어제 같은데 경인년도 벌써 거의 6분의1이 흘러버렸다.
세월이 빨리 간다는 건 세상이 빨리 변한다는 뜻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세월이 너무 느리고 변화도 없어 지루했었다. 게임방도, 극장도, 도서관도 없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고작 학교에 다녀오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30대 중반까지 하품하며 산 필자가 전혀 다른 세상인 미국에 건너와 장년기를 정신없이 보냈다. 그러나, 요즘 진짜 다른 세상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특히 지난 20년간 한국에서 일어난 변화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뽕나무 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인 상전벽해는 세상사가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음을 비유하는 중국의 고사성어다. 비슷한 뜻이지만 더 어려운 말은 ‘천선지전(天旋地轉: 하늘과 땅이 돌아서 뒤바뀔 정도로 세상이 크게 변함)’이고, 더 쉬운 말은 ‘격세지감(隔世之感: 많은 변화를 겪어서 전혀 딴 세상처럼 느껴짐)’이다.
지난주 TV 퀴즈 프로그램인 ‘제퍼디(Jeopardy)’를 보다가 쇼크를 먹고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한국의 두 번째 큰 자동차 메이커로 ‘아시아를 일으킨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회사”를 묻는 질문이었다. “아니, 저렇게 어려운 문제를…”이라는 필자의 지청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애송이 출연자가 단박에 “기아”라고 맞췄다.
LA에서 10여년전에 본 제퍼디에서 ‘세계 유일의 분단국’을 묻는 질문에 출연자가 눈만 껌뻑거린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한국 자동차 메이커 중 넘버원이 아닌 넘버투, 그것도 이름이 아닌 이름의 뜻을 묻는 질문을 금방 맞춘 그 출연자가 신통했다.
하기사 한국산 자동차들이 미 전국의 도로를 누빈지 오래다. 70~80년대엔 ‘포니’나 ‘엑셀’을 봐도 반가웠지만 이젠 한국차가 너무 흔해 ‘제네시스’를 봐도 시큰둥하다. 자동차뿐 아니라 휴대폰, TV, 카메라, 냉장고 등 가전제품도 한국산이 미국시장을 좌지우지한다. 한국 핸드폰은 미국인 뿐 아니라 러시아인들도 두명 중 한명 꼴로 애용한다.
한국인은 10명중 9명 이상이 휴대폰을 갖고 있다. 개도 휴대폰을 물고 다닌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인터넷도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미국에 여행 오는 한국인들의 가장 큰 불만이 느린 인터넷이다. 전 세계 TV에서 한국제품 광고가 쏟아질 뿐 아니라 지구촌 어느 도시에서나 한국제품을 선전하는 빌보드(대형 광고판)를 쉽게 볼 수 있다.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이웃 밴쿠버BC에서 지금 또 다른 상전벽해가 이뤄지고 있다. 양궁과 태권도에서만 따는 줄로 알았던 금메달을 빙속 500미터 경기에서, 그것도 남녀부문을 모두 한국선수가 석권했다. 어느새 동계 올림픽에서도 한국이 강자로 떠올랐다. 변변한 스케이트장이 없어 한강이 얼기만 기다렸던 중·노년층에겐 꿈같은 얘기들이다.
지난해 모처럼 서울을 방문했던 필자는 영락없는 ‘립 반 윙클’ 노릇을 했다. 워싱턴 어빙이 쓴 단편소설의 주인공인 그는 사냥하러 갔다가 숲에서 늘어지게 한숨 자고 집에 와 보니 그동안 20년이 흘러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영국 식민지였던 동네에 독립국이 된 미국 국기가 휘날리는 등 상전벽해가 이뤄져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괄시 받는다.
모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타향살이하는 한인들에게 나쁠 것이 없다. 괜히 잰 체하며 은연중 재미동포를 시대에 뒤진 사람으로 폄하하는 본국인도 있지만 대수롭지 않다. 우리도 우리를 보는 미국인들에게 요즘엔 좀 잰 체해도 괜찮다는 기분이 든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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