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서해룡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당시 조선은, 권력투쟁에 의한 정치적 소용돌이와 일본에 의한 본격적인 침략행위를 시작으로, 청나라와 로시아의 강력한 대조선 세력확장정책까지 겹친 상황가운데서 조선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있었다. 조선대원군의 강력한 쇠국정책은 일본에 의해 결정적으로 깨어지고, 이미 조선의 조정은 무력화되었으며 청, 로시아, 일본 3국의 이권쟁탈전의 마당이었다. 이에따라, 조정은 친청파, 친로파, 친일파로 갈라져서 3국의 하수인이 되어 권력다툼과 이권다툼으로 서로간에 모략중상으로 만신창의가 되어있는 형국이었다. 당시에 여러나라의 주한공사관이 나와있었으니 그중에 일본의 주한공사로 이노우에(井上馨)라는 자가 있었는데 교만하고 교활한자 였다.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의 국왕추대의 모략」에 관련된 배후의 인물로 의심받아 민비(閔妃)의 분노를 사게 되었으며, 또 이노우에 공사가 고종황제와 민비에게 약속한「300만엥(円)」기증건(件)의 불이행등으로 그 신뢰도가 떨어져있는 가운데, 일본본국에서 이노우에 공사후임자로 일본육군중장(中將)출신 미우라(三浦梧樓)라는자를 임명하였으니 후일, 이노우에와 함께 민비의 암살을 결행한 행동대의 총책임자였다.
1894년 8월 1일 청과 일본 양국의 “선전포고”로 청일전쟁이 발발하며 1895년 4월 7일에 일본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으나 종전후 전쟁보상과정에서 일본이 과도한 보상을 요구하자 로시아, 독일, 불란서등 3국의 열강들이 일본에 강한 압력을 넣어 일본은 요동반도점유를 포기하고 강화조약을 맺게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전승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3천만양(兩)의 거의 전부를(약 오억엥) 군비확장에 투입하여 그로부터 10년후에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러일전쟁)
청일전쟁에서 패전한 청국은 국제무대에서는 물론 조선내에서도 그위세가 꺾였으니 청의 승전을 기대했던 민비도 러시아를 의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일본은 그들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이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가 민비의 존재라고 결정짓고, 민비의 암살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들은 결행의 날을 10월 8일로 정하고, 새벽4시까지는 「민비암살」을 완전히 끝내기로 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10월 7일 밤12시에 일본에서 건너온 낭인(칼잡이)들을 포함하고 검찰, 일본민간인을 포함해서 50여명은 총과 칼로 무장을 하고 우선 대원군의 거처인 공덕리(孔德里)로 향했다. 그들은 대원군을 앞장세워 대원군의 쿠데타로 위장해서 그책임을 뒤집어씨우고, 일본은 빠져나가려고한 잔꾀였다. 한밤중에 들이닥친 일본인들의 암살단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사태파악을 한 대원군은 천천히 필답으로 이야기를 나눈다음 의관정제한후 그들이 준비한 가마에 몸을 실었다. 행동대들은 왕궁을 향하여 가던중간에 그들을 기다리고있는 일본수비대와 140여명과 암살계획에 가담한 우범원이 이끄는 훈련대 200여명과 도합 300여명의 암살행동대가 왕궁을 향하여 달려갔다.
먼둥이 거의 터질무렵에야 그들은 왕궁에 도착했고 그들이 왕궁의 정문 광화문을 열려고하자 민비 충신 홍계훈 연대장(임오군란때 민비를 업고 피신시킨 충신)이 말을타고 달려와 서로간에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암살행동대는 열세였던 경비대를 뚫고 궁내로 쳐들어갔다.
암살행동대들은 깊숙이 쳐들어가 고종황제와 민비가 거쳐하는 건청궁(乾淸宮)까지 침입하여 칼을 빼들고 이리저리 소리지르며 민비를 찾으며 날뛰었다. 여기저기서 궁녀들의 비명소리가 궁안의 조용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귀를 찔렀다. 일본의 칼잡이들은 민비의 얼굴을 몰라 찾을수가 없었으니,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발악을 했다. 건청궁의 신령각(神寧閣)에 많은 궁녀들이 모여 떨고있는곳으로 쫓아간 칼잡이가 용모나 복장이 깨끗한 궁녀3명을 골라 끌고나와서 그 자리에서 참살했다. 나중에 궁녀들의 입증으로 참살된 세사람의 궁녀중 한사람이 「민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행동대에 합류했던 경찰부장이 민비의 시신을 헌문짝에 올려놓고 이불로 덮어씨운다음 건청궁의 동쪽에 있는 녹원(鹿園)이라는 정원에 옮겨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린다음 화장했다.
이렇게 해서, 청러일 삼국세력의 각축장이고, 정치적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조선왕조 궁에 군림해서 자기뜻한바대로 휘둘렀던 「여걸 민비」의 육체는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1895년 10월 8일 이른아침까지 모두 끝난것이었다.
이와같이, 일본정부의 최고위층에서 극비리에 암살계획이 계획되어, 일본인들의 칼잡이와 주한일본공사, 공사관직원들이 한국의 명성황후를 암살한 사실이 입증되어있는데도 당시 일본의 히로시마지방재판소(廣島地方栽判所)의 판결은 「관계자전원면소(關係者全員免訴)」였으니 말이되는가.
아무리 일본이 영토확장에 눈이 멀어 남의나라를 침략했다고해도 한나라의 황후를 그토록 처참하게 암살할 수가 있으며 한나라의 황제와(1919년 1월 21일 서거:고종) 황태자(순종: 1926년 4월 26일 서거)를 그토록 잔인하게 독살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는, 그나라를 그렇게 악랄한 방법으로 식민지화하여 국민들을 그렇게도 참혹하게 학대할 수가 있단말인가!
우리민족은, 영원히 이런것을 기억해야 하며, 왜 그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가슴깊이 생각하면서, 가슴아픈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절대로 잊어서는 않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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