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캘리포니아서...공화당내 첫 아시아계 의원 기록
지역구-워싱턴 오가면 힘든 의정생활 불구 성실성 인정
3선 기간동안 본회의 참석률 100%. 최다발언 기록
하원의원 시절 뉴트 깅그리치 의장과 함께.
1992년은 한인이 미연방 하원에 진출한 원년이었다. 이해 실시된 선거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캘리포니아 제41지구에서 출마한 김창준 후보가 당선됨으로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연방의회에 진출한 해로 기록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인들의 미정계 진출은 요원한 꿈으로 여겨지던 시기였으므로 김의원의 당선은 재미 한인사회에 일대 경사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김창준, 미국명 제이킴이란 인물은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소수민족으로 성공한 비지니스맨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성공을 바탕으로 로스앤젤레스 인근 다이아몬드 바의 시의원과 시장을 지내면서 정치력을 다소 쌓았지만 그가 정계에 입문하게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도시계획을 설계하는 전문인으로서 그가 설립한 제이킴 엔지니어스를 주내 500대 중소기업으로 도약시킨 경영인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그와 경쟁했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법률공부를 한 변호사 출신들이었다면 그는 도시계획 전문 경영인으로서 기성 정치인들과 차별화를 시키는데 성공함 셈이었다.
그가 유권자들에게 어필했던 주된 이유는 고난과 노력끝에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입지전적 인물이라는데 있었다. 61년에 태평양을 건너온 유학생으로 병원 청소원, 신문보급소등 고학을 통해 남가주대학(USC)에서 학사와 석사를 따고 전공을 따라 환경문제를 다루는 하수처리 설계회사에 들어가 매니저까지 지내고 창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유권자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찍어준 것이었다.
그와같은 지역사회 인기를 바탕으로 그가 하원의원에 당선되기 까지 미전역의 재미동포들이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다. 한국인이 연방의원에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원거리 지역의 한인들이 후원회를 만들고 성금을 모아 주었다. 그의 당선은 재미 한인사회의 자랑이자 공화당으로서는 당내 첫 아시아계 연방의원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의 성공신화가 전해지면서 미국 역사교과서 근대사 편에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상징적 인물로 선정, 소개되었다. 그는 동포 2세들의 역할모델이 되었고 같은해 선거에서 오리건주의 임용근 후보가 주 상원의원에, 워싱턴주의 신호범 후보가 주 하원의원에 각각 당선되는 정치력 신장을 이루었다.
초선의원 시절 김의원은 열심히 발로 뛰는 의원이었다. 선거구민들에게 공약한대로 공공사업및 교통위원회와 중소기업 위원회에 소속되어 열심히 일했다. 원내 발언도 자주 했고 그런 모습이 TV를 통해 중계되면서 그는 초선의원 답지않게 유명세를 탔다. 의원생활을 하면서 그는 1주일을 워싱턴의 국회와 캘리포니아의 지역구로 나누어 살았다. 매주 목요일 밤이면 비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 지역구로 갔다가 레드 아이라고 불리는 월요일 밤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되돌아 왔다. 지역구로 가는 비행기에서도 법안이며 보고서를 검토하고 답변을 준비하느라 눈을 붙일 틈이 없었다. 비행장에 내리는 순간 현지 기자들의 예리한 질문공세와 맞닥뜨려야 했고 민주당 소속의 시민단체들이 정책토론을 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어 맞대응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주말엔 3개 카운티나 되는 지역구의 문제들을 돌아보다가 비행기로 화요일 새벽 워싱턴에 도착하는 즉시 의사당으로 달려가는 일과를 소화했다. 그는 의사당에서도 부지런한 의원, 모범적인 의원으로 통했다. 당시 하원의장이었던 뉴트 깅그리치 의장은 그를 표결에 불참한 적도, 회의에 삐진 적도 결코 없었던 성실한 의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자신이 한국인임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 미국에서의 성공과 경력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당선직후 그는 한국사회를 비롯, 아시안계의 권익을 위해 일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최초의 한국인 연방의원에게 쏟아지는 기대에 부응해야할 책임감도 느꼈다. 한인사회, 더 나아가 아시아계 커뮤티니티는 그에게 또다른 지역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원생활을 하면서 갈등을 느낀 적이 많았다. 소수수민족의 권익과 관련된 법안, 이민정책이나 불법체류자와 관련된 법안등을 놓고 당의 노선과 달라질때 고민했다. 미국인 유권자들은 그가 한국인 출신으로 지역구보다 한인들을 더 위한다고 불만스러워 했고 한인들은 그가 조국을 배반하고 미국인만을 위해 일한다고 섭섭해 했다. 그런 갈등은 의원생활 내내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존재였다. 그는 미국시민이고 국회의원이지만 몸속엔 한국인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을 그는 숙명이었다고 말했다. 그로인해 곤란을 겪는다 해도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재선을 준비하고 있던 93년 7월 그에게 예기치 않았던 시련이 다가왔다. 선거 캠페인중 사설로서 그를 지지했던 LA타임즈가 아주 불리한 폭로기사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그가 한국기업의 돈을 선거자금으로 쓴 의혹이 있고 제이킴 엔지니어스 회사 사무실을 임대료를 내지 않고 사용했다는 것까지 부정한 행위로 몰아가며 연일 포탄을 퍼부었다. 사실이 아닌것, 미국의 선거제도를 미처 몰랐던 부분에 대해 해명했으나 타언론들 까지 가세해 그를 괴롭혔다. 이때 거론된 한국기업들은 현대, 삼성, 대한항공, 한보그룹 같은 대기업들이었다. 이로인해 그는 의원생활에 엄청난 부담을 안았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재선에 성공했도 그 어렵다는 ‘꿈의 3선’고지 마저도 탈환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러나 4선을 앞둔 시기, 연방수사국 FBI의 수사가 시작됐고 그 결과로 인해 제이킴의 정치생명은 끝났다. 그러나 그는 연방의원 3선동안 본회의 참석률 100%, 최
다발언 기록을 남겼다. 우수의정상도 받았다.
1993년 11월 빌 클린턴 대통령은 북미자유무력협정 비준을 앞두고 김창준의원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도움을 청했다.
■ 1998년 선거자금법 위반 기소
유죄판결후 4선 도전 실패
그후의 과정을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은 이렇게 쓰고 있다. "1993년 1월부터 1999년 1월까지 3기에 걸쳐 재직함(미국 하원의 임기는 2년), 그러나 1997년 7월에 연방 선거자금법을 위반하여 기소되어, 1998년 유죄판결을 받음, 이 때문에 1998년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2000년에는 선거구를 바꾸어 출마했지만 다시 낙선됨." 이에대해 김창준 전의원은 최근에 출판된 ‘흔들어라.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란 자서전에서 "FBI는 나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짓고는 3개월동안 선거구에 가지 못하도록 했다. 프리바겐(사전 형량조정제도)을 한것이다. FBI의 의도는 3선으로 끝을 내라는 뜻이었다.이미 선거운동은 시작되었는데 후보가 선거구에 가지 못하니 무슨 수로 선거에 이길수 있겠는가. 나는 워싱턴에 앉아서 선거가 진행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가슴에서 분노가 솟고 피눈물이 쏟아졌다. 결국 나는 득표순위 2위로 선거에 패배했다." 그의 4선은 좌절됐고 선거가 끝난후 그는 경범죄로 플리바겐에 동의했다. 하원의원을 하는 동안 내내 그를 옭아매고 괴롭혔던 문제들과 더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아 플리바겐에 동의해 버렸다고 말했다. 이후로 미주에 한인 연방 하원의원 후속타는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그로서 맥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99년 정계에서 은퇴한 김창준 전의원은 고려대 동북아경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위촉되었다가 현재는 워싱턴 포럼 이사장으로 있다.
1994년 뉴욕을 방문했을때 필자와 함께
조종무<언론인.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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