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 문학단체가 없었던 1970년도 후반에 문학동호인 10명이 매달 모인 적이 있었다. 그후 80년 대 초부터 문학단체들이 속속 생겨나고, 불행하게도 몇 년 사이 회원 몇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연히 그 모임은 없어졌다.
초기 이민생활에서 일인삼역을 해야 하는 가정주부가 영어공부도 아닌 ‘시’ 공부를 하면서 동인지까지 발간하는 것을 보던 남편 친구가 “그 따위 비생산적인 일을 뭐 하러 하느냐”며 비웃었다. 다행히 남편의 생각은 달랐지만 그래도 나는 가사와 사업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글쓰기를 일상에서 네 번째 일로 격하시켰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몇 십 년을 버텨왔다.
얼마 전 해질녘에 소녀 같이 예쁜 중년 부인이 우리 산장에서 하루 묵겠다며 찾아 왔다. 그때 옆에 서있던 그 부인의 오빠 H씨가 20년 전에 발간된 내 시집 ‘캘리포니아 갈대’를 불쑥 내밀며 “이 시집 아직도 소장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직 몇권 남아 있다며 그 시집 구입처를 물었더니 그는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한 가득 차려진 밥상에서 초면인데도 한 식구처럼 둘러앉아 맛있게 저녁을 먹으며 긴 이야기를 했다.
H씨는 학창시절, 시인이었던 선생님이 전쟁 통에 자신의 시집 한 권도 챙기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다음날 학교도 결석하고 시내 헌 책방을 다 뒤져서 선생님의 시집을 찾아드렸던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동네 거라지 세일에서 내 시집 ‘캘리포니아 갈대’를 보는 순간 옛 일이 생각나서 얼른 구입해 여동생에게 보여 주었단다.
시집을 본 동생은 이참에 나를 만나러 가자며 다른 식구들과 의기투합해서 오렌지카운티에서 한걸음에 우리 산장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간의 어려웠던 일, 그럼에도 성실하게 산 미국생활 등 소설 같은 얘기들을 함께 털어놓았다. 그 밤은 유난히 짧았다.
이 얼마나 살 맛 나는 만남인가! 이런 흐뭇한 감정으로 생긴다는 다이돌핀은 엔돌핀보다 4,000배나 높은 긍정적 호르몬을 만든다니, 글쓰기를 어찌 경제적 가치로만 따질 것인가!
글을 쓰면서 평소 실수가 많은 나를 다스리며 현실을 극복하는 인내심도 키웠고 과분한 사랑도 받았다. 때로는 미숙아 같은 작품으로 나만이 느끼는 희열도 맛보았다.
그래서 시인이란 사명감으로 해마다 우리 산장에서 윤동주 문학의 밤 행사를 열었다.
그때마다 다른 저항 시인들에게 미안했었는데 올해는 한일합병 100년을 맞아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네 분을 추모하는 문학의 밤 행사를 지난 24일에 했다.
강제병합 명목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그렇게 36년 살았던 슬픈 역사는 더 잊지 말아야 할 역사다. 그래서 그 네 분들의 시가 더 감동을 준다.
생산적인 일과 비생산적인 일을 무엇으로 구분할 것인가. 물질만능인 시대에 아무리 과학과 문명이 발전해도 정신적 황폐와 자연훼손을 막지 못한다면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이성호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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