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면 날씨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여름 동안 고산준령을 누비고 다닌 주말 등산객들이다. 반바지 차림으로 눈길을 걷는 시애틀 특유의 여름산행 시즌이 끝날까봐 조바심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꼭 눈 덮인 높은 산만 명산으로 꼽지는 않는다.
워싱턴주 산들은 모두 명산이다. 물론 눈산(Mt. 레이니어, 14,411피트)이 높이로나 경관으로나 최고다. 하지만 등산객들과 가장 친근한 산은 눈산이 아니다. 눈산 높이의 3분의1에도 못 미치고 눈이 쌓이는 날도 드문 사이 산(Mt. Si, 4,167피트)이다. 왕복 8마일, 등반고도 3,400피트인 이 산을 연간 8만~10만 명이 오른다. 매일 평균 250명 꼴이다.
사이 산은 매력이 많다. 우선 가깝다. 시애틀에서 45분, 벨뷰에서 20분 거리다. 서울의 도봉산·백운대도 시내버스 타고 가는 거리이므로 365일 바글댄다. 정상의 경관은 말할 것도 없다. 턱밑에 전원도시 노스 벤드가 펼쳐져 있다. 1980년대 히트한 TV 드라마 ‘트윈 픽스’(Twin Peaks)의 무대였다. 눈을 들면 벨뷰-시애틀의 다운타운과 퓨짓 사운드 넘어 올림픽 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만년설의 눈산이 코앞에서 손짓한다.
I-90 회랑에 포진한 많은 인기(주요) 등산로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시사철 오를 수 있다는 점도 사이 산이 ‘인기 짱’인 이유다. 필자는 지난 10여년간 이 산을 줄잡아 30여회 올랐다. 주로 봄~가을에 올랐지만 머릿속에는 동료들과 눈밭에 둘러앉아 점심 먹은 것과 반들반들 미끄러운 트레일을 엉금엉금 기다시피 내려왔던 겨울산행 추억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사이 산은 1910년 엄청난 산불 피해를 입었다. 주차장 일대의 현 코니퍼(침엽수)들은 그 이후 자라난 2세들이다. 트레일 중간지점의 ‘스낵 플랫’(Snag Flat, 그루터기 평지)에는 당시 타고 남은 거목들이 생태계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연학습장이 마련돼 있다. 사이 산과 그 동생격인 리틀 사이 산은 지금도 자연자원 보호구역으로 돼 있다.
등산로는 주차장부터 정상까지 계속 오르막이다. 4마일 구간에 3,400피트를 오르려니 당연하다. 덱크와 벤치가 설치돼 있는 스낵 플랫(1.8마일 지점)만 빠끔하게 평평하다. 시간에 쫓기거나 체력이 달리는 사람들은 대개 이곳에서 뒤돌아 하산한다. 반마일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므로 자기 발걸음이 얼마나 빠른지(대개는 얼마나 느린지) 실감하게 된다.
사이 산의 실제 정상은 300피트 높이의 바위봉우리인 ‘헤이스택(Haystack)’이다. 노적봉처럼 삐쭉 솟은 이 바위엔 계단도, 철책도 없다. 요령껏 바위에 달라붙어 오르내려야 한다. 눈비가 오거나 추운 날씨엔 미끄러지기 쉽다. 실족해 떨어지면 물론 하늘나라로 직행한다. 필자도 4년전 후들거리며 이곳에 올라갔지만 경관이 바위 아래보다 더 좋을 게 없었다.
이 산에 10년전 혼자 오를 때 ‘Si’라는 이름이 신기했었다. 너무 힘들어 한숨(사이, sigh)이 나와서인지, 아니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성경의 ‘사이나이 산(Sinai, 시내 산)과 닮았기 때문인지 아리송했다. 뒤에 알고 보니 1862년 사이 산 아래에 정착한 농부 조사이아 메릿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의 별명이 ‘엉클 사이(Uncle Si)’였다.
지난 토요일에 또 사이 산에 갔다. 등산객들이 끝자락 여름 날씨를 즐기려는 꼬리를 이었다. 산악회 동료들보다 훨씬 뒤쳐져 정상에 다다른 필자 부부는 하산도 자연히 늦어졌다. 필자 뒤에서 무거운 다리를 끌며 내려오던 아내가 갑자기 환호성을 올렸다. 길섶에서 주먹만한 송이버섯을 캔 것이다. 그녀는 작년에도 그만한 버섯을 캤었다. 사이 산에 버섯이 난다는 것, 특히 길섶에서 그 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직껏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10월 첫 주말인 오늘도 날씨가 기막히게 좋다. 다음 주말에도 날씨가 괜찮다는 예보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끝자락 여름산행을 즐기자. 운이 좋으면 송이버섯도 캘 수 있다.
윤여춘(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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