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폭탄이 쏟아진 지난 17일 광주 동구의 카센터 사장 최승일(54)씨는 강으로 변한 도로에서 한 할아버지가 빗물에 휩쓸리다 맨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발견했다. 곧바로 물살을 헤치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간 그는 팔을 잡아 꺼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맨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급류 의 힘이 너무 강한 데다 할아버진 이미 얼굴까지 잠겨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우선 나무판자로 물길을 막아 숨 쉴 공간을 마련한 뒤 뒤쫓아온 직원 및 시민들과 힘을 합쳐 사투를 벌인 끝에 그는 간신히 할아버지를 구할 수 있었다. 목숨을 건 최씨 선행은 큰 박수를 받았지만 자칫 더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 폭우가 내릴 때 맨홀은 도심 속 공포의 블랙홀로 변한다. 2022년 8월 서울 서초구에서도 무릎까지 물이 찬 길을 걷다 뚫려 있는 맨홀 구멍으로 빠진 50대 누나를 40대 남동생이 구하려다 함께 숨진 바 있다. 지난 6월 부산 연제구에선 30대 여성이 배수구 역류로 뚜껑이 열린 맨홀에 빠졌다가 주변 시민들의 도움으로 구조됐다.
■ 사실 맨홀 추락 사고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맨홀 뚜껑 아래 철망이나 지지대를 설치, 사람이 아래로 떨어지거나 안으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도록 하면 된다. 정부도 이를 의무화한 상황이다. 문제는 이 규정이 2023년 이후 새로 설치된 맨홀에만 적용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전국 300여만 개 맨홀 중 추락방지시설이 설치된 곳은 10%도 안 된다. 비용을 지자체가 온전히 부담해야 하는 터라 지역별로 설치율도 큰 차이가 난다. 전북은 1%에도 못 미친다.
■ 상하수도와 가스관, 전력선, 통신망 등 지하 인프라를 유지 보수하는 데 필요한 맨홀은 도시화 산물이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악마의 목구멍’이 된다. 언제까지 시민 목숨을 운에 맡길 순 없다. 사고 현장마다 의인이 나서주길 바랄 수 없는 노릇이다. 영웅에게 의존하기보다 그들이 목숨을 걸 일도 생기지 않도록 안전한 도시를 구축하는 게 더 중요하다. 침수위험지역 맨홀만이라도 추락방지시설 설치를 서둘러야 한다. 이젠 우리가 의인을 지킬 때다.
<박일근 / 한국일보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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