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2월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한국 산악사에 가장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에 있을 히말라야 원정 훈련을 하던 대원들이 취침 중 눈사태를 맞아 10명 전원이 사망했다. 밤새 3미터 넘게 내린 눈이 협곡으로 흘러 덮친 것이다. 만일 이 사고가 없었다면 한국의 에베레스트 정복(77년)은 몇 년 앞당겨졌으리라 산악인들은 말한다.
겨울산에서 눈은 무섭다. 89년 겨울, 백두대간 종주 도중 하룻밤 사이 2미터의 눈이 내려 오대산에서 탈출한 기억이 난다. 수영하듯 눈을 헤치고 산림 도로로 내려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작은 계곡에 빠졌을 때는 눈이 키를 넘었다. 바람이 눈을 쓸어오면 그냥 눈에 묻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눈이었다. 산림 도로를 따라 평소 4시간 거리 상원사까지 4일에 걸쳐 눈과 싸워야 했다.
1984년 은벽산악회 여성대원 김영자(당시 31세)가 안나푸르나(8091m) 정상에 섰다. 한국 여성 최초로 8,000미터급 등정이었다. ‘풍요의 여신’이란 뜻의 안나푸르나는 한국 여성 등반가에게 동계 세계 초등을 허락하였다.
세계적인 등반가 예지 쿠쿠츠카(폴란드 산악인, 14좌 완등, 89년 사망)보다 3년이나 먼저 세계 등반사에 남을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정상에서 촬영한 사진을 갖고 있던 세르파가 하산 도중 추락하였다. 훗날 정상 사진이 없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결국 공식적으로 안나푸르나 동계 초등 기록은 쿠쿠츠카가 갖게 되었다.
안나푸르나는 초등은 1950년 프랑스 등반대가 해냈다. 당시 등정자는 루이 라슈날과 모리스 에르조그다. 그래서 안나푸르나는 ‘프랑스의 산’으로 불린다. 마치 낭가파르밧이 ‘독일의 산’인 것처럼, 안나푸르나 초등은 인류가 최초로 8,000미터보다 높은 곳에 올라선 역사적인 등반이었다.
지난 10월, 히말라야 8,000미터 등반의 역사가 시작된 안나푸르나에서 산악인 박영석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이 실종되었다. 전문가들은 눈사태에 쓸려 크레바스에 빠졌으리라 추측한다. 박영석은 동국대 산악부(82학번) 출신이다. 80년대 당시, 동국대 산악부실은 도서관 건물 지하에 ‘수중탐사반,’ ‘동굴탐사반’과 나란히 있었다. 규율이 강했고 남자 부원들만 있는 삭막한(?) 서클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하서클’이라 불렀다. 동국대 산악부는 90년대까지도 여자 대원을 받지 않는 ‘금녀지구’였다.
대학산악부는 ‘대학산악연맹’에 소속되어 있어 모두 동기가 되고 또 선후배가 된다. 박영석은 모든 대학 산악부원들이 좋아했던 영원한 선배이자 후배였다. 그의 인격은 그가 오른 산만큼 높았다. 위로는 선배를 잘 모시고 아래로는 후배들을 사랑해 주었다. 고산 경험이 적은 후배를 잘 이끌어 주었고 좋은 것은 늘 후배에게 양보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그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다.
박영석은 8,000미터 14개 봉우리 등정, 북극점과 남극점 도달, 그리고 7개 대륙 최고봉 등정이라는 아무도 하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땅덩어리가 작다고 생각의 크기도 작은 건 아니다. 땅덩어리가 작다면 생각의 크기로 맞서라’ 평소 그가 했던 말들이다. 그의 등반 철학은 국민에게는 희망을 북돋아 주었고 청소년들에게는 도전 정신을 가르쳐 주었다.
박영석, 그는 우리 눈앞에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극기와 도전으로 정리되는 그의 모습은 우리들 가슴에 남아있다. 그는 산이 좋아 산을 찾았고, 산이 좋아 산과 하나가 되었다.
“영석이형, 겨울 잘 지내세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년 봄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동민, 기석 내년 봄 다시 찾을 때에는 꼭 모습을 보여주게나.”
2011년 가을, 세계 최초라는 기록을 갖고 있던 사나이 박영석은 그가 사랑했던 후배들과 같이 아득하고 구름도 못 오르는 안나푸르나 남벽의 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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