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시엽
W.A. 고무 실험실장
미국에 갓 정착한 지인의 통역을 돕기 위해 샌타애나 시청을 방문했다. 한낮 시청 앞 잔디밭은 갈 곳 없는 노숙자들의 사랑방이었다. 잘 아는 10여명의 노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악수를 하거나, 눈인사를 나누느라 잠시 부산을 떨었다.
“친구들이죠.”
“친구라? 이름도 아시네요. 혹시 노숙자 출신 아니세요?”
말없이 지켜보던 지인이 나에게 조크를 던졌다. 그는 노숙자들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한인교회가 주관하는 노숙자 사역에 봉사자로 참여한지 17년이 되었다. 매주일 아침 샌타애나 시청 주차장에서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역인데 나의 임무는 식사 전 노숙자들에게 물수건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 임무는 첫 봉사 때 함께 따라 나섰던 어머님의 아이디어로 시작되었다.
“손이라도 좀 씻게 하고 식사를 하게 했으면 좋으련만 ·····”
노숙하고 곧장 아침 배식 현장에 오는 노숙자들의 손이 깨끗할 리가 없다. 첫 봉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차 안에서 어머님은 무슨 대발견이라도 하신 듯 무릎을 탁 치며 입을 여셨다.
“야! 유리 갓난애 때 쓰던 물수건 있지. 돈은 내가 댈 테니 그 거 노숙자들에게 나눠주렴.”
어머님이 말씀하신 물수건은 손자 유리를 키울 때 쓰시던 일회용 ‘Baby Wipes’. 손 닦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 다음 주일 나는 어머님의 당부대로 그 물수건을 사들고 첫 임무에 나섰다. 물수건은 노숙자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이 작은 봉사는 이미 고인이 되신 어머님의 뜻을 지켜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그 동안 달라진 것은 100장 정도면 충분하던 물수건 수요가 2배로 늘었고 물수건이 오븐에서 따뜻하게 덥혀져 제공된다는 사실이다.
“따뜻한 한 끼 식사 못지않게 따뜻한 대화가 중요해요. 그저 친구처럼 대하면 됩니다.”
나는 지인에게 경험담을 하나 들려주었다.
어느 주일 길게 늘어선 노숙자들에게 물수건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노숙자 피터가 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다 나의 발걸음을 잡았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듯 싶었다.
“바로 이 친구야. 허름한 행색의 나를 당연히 모른 척 하고 지나칠 줄 알았지. 나도 자존심을 먹고 살잖아. 그 날 정말 고마웠어.”
그 날 나는 직장 동료와 회사 근처 한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었다. 점심때면 항상 붐비는 식당 입구에 낯이 익어 보이는 백인이 얼쩡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마치 손님들에게 구걸이라도 하려는 듯 보였다. 다가가 보니 피터가 분명했다. 알코올 중독으로 노숙자 신세가 된 그는 내가 영어로 책을 출간하면 감수를 해주겠다는 문학도이다. 피터가 나를 알아본 모양인지 얼른 고개를 돌려 나를 외면했다.
‘아는 체 할까? 동행이 있는데, 창피스럽게 … . 못 본 체 하지 뭘. 피터도 고개를 돌렸는데.’
순간 나는 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지혜로운 순간 판단이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그를 결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있는 피터의 어깨를 툭 쳤다.
“피터, 만나서 반가워. 애인과 점심 약속이라도 있는 거야. 우리 점심이나 할까?”
“고맙네, 아무래도 애인을 기다리는 게 나을 듯해.”
고개를 들어 나를 잠시 쳐다본 피터가 점심 제의를 지혜롭게 사양하며 빙긋 웃었다.
“갚지 못할 사람을 도와라” - 어머님의 말씀이 문뜩 생각났다. 받은 은덕을 저버릴 배은망덕할 사람을 도우라는 뜻이 아니다. 베푼 은덕은 잊으라는 말이다. 갚을만한 사람을 돕고 보상을 기대하다 배신감을 느끼면 배은망덕 소리가 나온다는 거였다. 배은망덕이란 말이 베푼 자의 입에서 나오면 영 듣기에 거북하다. 베푼 은덕에 대한 최대의 보상은 기쁨이 아닐까 한다. 받은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베푼 은혜는 물에 새겨야 한다.
“오늘 저 도와준 것 물에 새기셨겠지요?”
시청을 나서며 지인이 나를 보고 웃었다. 아 참! 내가 받은 은혜들은 어디에 새겨놓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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