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옆집은 질적으로 풍요롭게 지혜 많은 삶을 즐기고 있는 유태인 가족이다. 지붕을 새로 하려는지 며칠 전부터 드라이브 웨이(Drive Way)에 자재를 쌓아놓고 있더니 요즘 자주 내리던 가을비가 멎자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부분적으로 고칠까 또는 전체를 갈아 치우는가 궁금해서 선룸(Sun Room)을 통해 흥미 있게 관찰하게 됐다.
이른 아침 우르르 차에서 내린다. 천막천으로 만들어진 넓은 허리띠 또는 조끼에 많은 호주머니 속에 필요한 장비가 들어있는지 주렁주렁 매달고, 높은 사다리 잘도 올라간다. 조직적이어서 일의 진행 속도가 빠르다.
낡은 지붕을 뜯는 사람, 걷어내는 사람, 덮개 없는 트럭 안으로 던지는 사람, 두꺼운 유지(油紙)를 까는 사람, 못을 박는 사람 등등 역할 맡은 대로 리듬체조 하듯 움직이고 있다. 아름답게 빨리도 끝냈구나 감탄한 것이 10일 전쯤인데 드디어 우리 집도 지붕을 새로 해야 할 모양이다.
우리 부부는 매 주말 원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 고가도로를 지나며 볼티모어 항구 시에 펼쳐진 명멸하는 전등의 아름다움에 환희를 느끼며 용궁을 들락날락 오가고 하는데 지난 주말 밤늦게 집에 오니 낯설지 않은 트럭이 차고 문 앞에 바싹 붙어서 정차하고 있다. 비바람 세차게 몰아치던 날 지붕 가장 높은 곳의 덮개가 날아갔는지 천장에 지도가 희미하게 그려지더니 한두 방울씩 비가 새고 계단 위 카펫이 젖는다. 지금 여섯 살, 네 살 손녀 손자가 쓰던 코발트색 타원형의 목욕통을 비새는 곳에 받혀놓고 그때그때 물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더니, 아주 작은 늪이 되어 한밤중 낙수(落水) 소리가 잠결 귀(耳)에 가야금 타는 소리로, 리듬이 고조되면 선학(仙鶴)의 춤이 연상되며 다시 꿈 속 고향 길을 헤매게 한다.
오랜 세월동안 청소를 하지 못하고 너무 높아 경사가 심한 우리 집 지붕은 낙엽의 쉼터가 되고, 홈통에 거름흙이 쌓여 한 해 살이 잡초가 들쑥날쑥 하고 있다. 더욱 90도 각을 이루고 있는 곳은 빗물이 줄줄 샌다. 덕택에 미국 올 때 가지고 온 허리 높이의 김장독에 감우(甘雨)를 가득 받을 수 있다. 한밤 중 가야금 타는 소리에 잠이 깨고 장단을 즐기며 커튼을 젖히면 빗줄기 역시 세차다. 날이 밝아 밖에 나가서보면 항아리 물은 넘쳐흐른다. 그래도 계속 비가 쏟아지면 항아리 속은 싱싱한 잉어가 소용돌이치는 듯 물방울이 튄다.
이렇듯 우리네 조상들은 빈한함 속에서 대자연의 풍요를 가슴 속에 담아두는 예지, 그 속에서 풍류(風流)를 즐기며 세진(世塵)의 고뇌를 해학(諧謔)으로 풀며 여유만만하게 살아오신 것 같다. 바야흐로 세계는 지리적 거리가 너무 좁혀졌고 잦은 여행으로 거리감도 둔해졌다. 컴퓨터의 기능 발전은 시시각각 진전되어 눈이 부시고 아날로그 시대의 우리는 따라가기 힘들고 어지럽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사건건을 동시에 알게 되고 끊임없는 정보는 인간의 두뇌에 쉴 큼을 주지 않고, 피로가 쌓여 사물에 대한 논리적 사고 분석능력도 무디게 되고, 창의성도 저하된다. 더욱 인간 수명의 연장은 범세계적으로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고 있고 정치적 사회적 해법을 찾기가 어렵다. 이 시점에서 젊은 세대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성장했고 시야도 범세계적으로 넓어졌지만 시간의 제약이 너무 많아, 풍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갖기가 힘든 것 같다. 개개인의 취미 활동에까지 시간의 배당이 어려워서 초조해하는 것일까.
연이나 지붕을 새로 하고 보니 흐트러짐이 없는 선(線)의 아름다움, 송송 구멍 뚫린 홈통 덮개까지 씌워 놓았으니 낙엽은 들어갈 수 없고, 지붕 끝자락에 꽂혀 있는 낙엽 걸림 장식에 잠간 쉬어 갈 수는 있다. 은행 잎새 모양의 걸림 장식이 엇비슷하게 두 줄로 꽂혀 있는 것이 보기도 좋고 애교 만점이다. 그리고 홈통을 통해 내려오는 감우(甘雨)도 항아리 가득 받을 수 있어서 더욱 행복하다.
임경전
수필가,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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