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중
수필가
어느 해 한국을 방문하면서 난을 재배하는 곳에 들른 적이 있다. 나무 등걸 모양의 기둥 같은 곳에 착생되어 피어난 하얀 꽃을 보는 순간 그 유명한 풍란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 이것이 풍란이죠?” 하며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다가가자 주인은 웃으며 “그건, 풍란이 아닌데요. ‘나도 풍란’이죠” 라고 했다.
“풍란과 거의 비슷한데 잎이 약간 커요. 풍란은 잎이 작고 가느다란 소엽인데, ‘나도 풍란’은 대엽이고 꽃은 ‘나도 풍란’이 에델바이스처럼 투명한 흰색인데, 풍란은 유백색이고. 큰 차이는 없지만 진짜 풍란과는 구별되지요” 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풍란’이라는 난을 들여다보며 “풍란이면 풍란이고 아니면 아니지, ‘나도 풍란’이란 이름을 가진 이상 자기는 없고 가짜 풍란 행세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초라하더라도 독립적인 자기 이름을 가졌더라면 그 꽃은 더 빛나 보이지 않았을까 측은해 보였다.
처음 볼 때, 고결하고 아름답게 보였던 꽃이 ‘나도 풍란’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평가절하 되고, 고고한 것을 동경하며 모방하려는 허영에 찬 이류 난초로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도 무엇이다>라고 자기를 과대광고 하는 것 같아 생긴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풍란 의식’이랄까, 그것이 어찌 식물에만 있겠는가. 사람들 사이에도 모방심리가 범람 하고 가짜가 성행하고 있으니 ‘나도 풍란’은 넘쳐난다. 정치계, 종교계, 문학계에도 시작이면서 마치 달인이나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나도 풍란’의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판을 친다.
예술작품에 대한 평을 읽어보면, 심사위원이나 평론가들은 언제나 개성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작품은 좋은데 개성이 없어 낙선’ 운운한다.
개성,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모든 창의적 활동엔 자기다운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사회는 ‘나도 풍란’의 시류를 타며 개성을 죽이고 있다. 자기가 없어져 가는 것이다. 대중사회에서 남과 다르기란 여간 힘들지가 않다. 남과 틀리다는 것은 곧잘 열등한 것으로 생각되고, 남이 하는데 나라고 빠질 수 없다며 부화뇌동하곤 한다.
모파상의 ‘목걸이’라는 단편 소설이 생각난다. 마띨드는 부유한 친구에게서 빌린 가짜 진주목걸이를 진짜로 알았기에 그녀의 나머지 인생을 망쳐야만 했다. 빚을 갚기 위해서 죽어라 고생하고 힘든 노동을 견뎌야 했는데 결국 그것이 모조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그녀의 인생은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그러니 ‘나도 풍란’이 되려고 하지 말고, 풍란이 아니더라도 고고한 난이 아니더라도 자기에 알맞은 자기 이름으로 피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의미 있고 소중하다.
‘나도 풍란’이란 난초의 이름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자신을 돌아보며 ‘나도 풍란’이란 의식 속에 위장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깊이 고민해봐야 내 분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풍란’이란 의식에서 탈피할 때 개성이 분명해진다.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보다는 ‘나 하나의 나’가 되려는 자기다움을 위한 고집이 있을 때, 자기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억지로 꾸며 뭔가를 보려주려 하다간 내가 쓰러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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