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제가 나서 자란 곳을 떠나 객지나 타향에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새긴 그리움이라고 하겠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죽을 때는 북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잊지 않는다는 말이겠다. 사람은 고향이라는 정서를 잊지 못한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민족은 유달리 고향정서가 깊다. 타향살이 실향민의 소망 중 하나가 죽을 때 뼈를 고향 땅에 묻히는 것이 마지막 간절한 소망이다. 고향을 잊고 사는 사람은 없다. 고향에는 대대로 이어오는 선대의 때 묻은 역사와 부모형제 일가친척 그리고 이웃과 벗들의 알토랑 사랑과 추억들이 산과 내와 들, 바위와 고목 한 폭의 꽃 풀잎에도 물안개처럼 피어나는 곳이다. 고향을 찾아 갈 수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특히 추석, 설 명절 때는 고향에 돌아가서 가족을 만나고 정겨운 일가친척 이웃을 만나며 조상의 차례를 올리고 자녀 후손에게 뿌리를 알게 하는 의미 있는 계절인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엄마의 품 같이 푹 안기고 싶은 아늑한 고향이 없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늘 산천경계 수려한 마천령 밑 ‘어산동’이라는 지명이 잊혀 지지 않는다. 내 나이 6세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우리는 함경남도 함주군 하지천면 상통리 541번지 큰집 아래채에 거처하다가 다시 형편이 좀 나아져서 도청소재지인 함흥으로 이사하여 성장했다. 거기서 초중학교를 다니다가 8·15조국광복을 맞았다. 해방의 기쁨을 채 맛도 보지 못한 채 38선이 남북을 가르고 위대한(?) 소련군이 진주하고 김일성 일당을 앞세운 공산당이 무산대중의 붉은 깃발을 앞세워 약탈을 일삼는 1946년 공산당에 항거하여 선혈을 앞세운 역사적 함흥 3·13학생사건을 거쳐 북한을 탈출했다. 자유 대한에 나와 살다가 6·25를 만나 군에 입대했다. 종군 중 적의 포탄에 부상을 당해 부산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후송, 그 후 제대하여 가난과 정쟁 분단의 상처를 안고 결혼도 하고 자녀들 낳으며 교사로 서부 경남지역을 전전하다가 미국으로 이민하는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실향민 집시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 아이들도 마음 깊이 살뜰히 사모하는 고향이 없다. 사실 내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군 학성면 장형동 대리석 촌이다. 어렸을 때 들은 어설프면서도 마음에 각인된 지명이 ‘어산동’이다. 그러나 이곳엔 짜릿하며 감명 깊은 추억거리는 생각나는 게 거의 없다. 누가 내 고향을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함흥’이라고 대답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어산동’이 앙금으로 남는다.
실향민의 자녀가 되어 고향이 없는 아이들에게도 미안하지만 80을 넘은 실향인의 마음에는 고향이 그립다는 생각보다 영영 고향의 땅을 밟아보지 못할 것 같은 서글픈 마음이 앞선다.
“차표 한 장 사들고” 송대관 가수의 노랫말 같이 언제나 가볍게 갈 수 없는 고향. 이데올로기로 처진 휴전선 철조망이 보이지 않는 높은 옹벽으로 가로막아 잘린 북행선(경평·경원선)이 비무장지대에 60여 성상 녹슨 채 누워있다. 망향의 한(恨)은 밤마다 북두칠성 바라보며 한 밤을 천백 토막 내고 천만 길 아픈 우물 두레박질 하며 이역만리 고향 하늘 바라보고 눈물진다.
설이 되면 모두 만남의 부픈 보따리를 안고 정다운 고향으로 귀성하지만 내게는 그림의 떡 같이 먼 이야기요 이룰 수 없는 허황한 꿈이다. 내 아이들에게도 물려줄 살뜰한 정서를 그릴 고향도 없다. 점점 멀어져 가는 고향이 더 못 견디게 그리움은 어쩐 일인가? 백발의 주름진 마음의 노약함일까? 그래도 내 다리로 걸울 수 있을 때 꼭 한 번 고향의 땅을 밟고 그 흙냄새를 맡고 싶다. 더 간절한 것은 6세 떠난 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진짜 안태의 고향 어머니의 탯줄을 갈라 준 ‘어산동’ 두메산골을 찾아가 내 혼의 그림자를 더듬어 보고 싶다.
고향! 고향! 고향! 누구나 가는 고향! 그러나 나만이 못 가는 환상의 고향! 죽기 전에 꼭 가고 싶은 고향!
이경주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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