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수업을 듣던 어느 날 교수님이 대화해보지 않은 학생들 두 명씩 짝지어 한 명은 안대로 눈을 가리고 다른 한 명은 안내하며 캠퍼스를 돌아다니라고 하셨다. 학생들이 서로에게 믿음을 키우도록 도와주려는 의도는 백번 이해했으나 초등학교 서머캠프에서 했던 것을 대학교에서 하려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눈을 가리자 갑자기 두려움이 덮쳤다. 옆에 파트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부자연스럽게 뻗으며 발이 땅에 닫기 전에 걸림돌은 없는지 수시로 체크했고 그러다 보니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내 어정쩡한 자세와 찡그린 얼굴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까봐 나에겐 보이지도 않는 그들의 눈을 의식했다.
한 5분이 지나자 파트너에게 좀 더 의지하게 되었다. 내가 상상하는 온갖 사물들이 내 머리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말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파트너가 잘 피해주리라고 믿었다. 나를 지배하던 두려움이 사라지자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훨씬 날카로워졌다.
얼굴을 안대로 가리고 남은 이마와 턱에서 느껴지는 바람이 너무도 생생해 시원하다 못해 차가울 정도였다. 사람들의 걸음소리조차도 제각각 다르게 들려서 그들이 얼마나 바쁜지, 혼자인지 여럿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도 없이 접했던 자전거 소리도 그날따라 특이하게 들렸다. 무직한 자전거의 무게가 지나가면서 밟힌 자잘한 자갈들의 몸부림, 갑작스럽게 뚫고 지나간 방해꾼 덕분에 순간적으로 거세진 바람. 빠르게 지나갔지만 그 자리에는 이 모든 소리가 합해진 섬세한 울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주위환경을 다른 감각으로 사용하여 차곡차곡 채워나가 보니 결국에 내가 듣고 만지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하나의 큰 그림으로 그려졌다. 전에는 각자의 길을 가기 바빠 무심코 지나쳤던 사람들도, 그들이 걷는 길과 그 길이 안내하는 건물들도, 심지어 건물들을 맴도는 다람쥐 까지도 다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곧 마음이 평온해졌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세상의 폭은 단지 보이는 세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자주 잊어버린다. 시각을 통해 얻는 것만큼 놓치는 것도 많음을 배우고 그것을 짧게나마 느껴보는 경험이었다.
<이예지/UC 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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