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대한민국뉴욕연극제 위해 뉴욕방문
▶ “젊은시절 뉴욕생활, 지금까지 무대에 서는 힘”
뉴욕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한인들에게 한국 문화에 대한 갈증을 달래주다가 한국으로 돌아갔던 장두이가 제1회 대한민국뉴욕연극제로 뉴욕에 왔다. 그의 뉴욕생활 16년과 앞으로의 삶에 대해 들어본다.
장두이는 못하는 게 없다. 배우인가하면 연출자고 작가고 학생들에게 연기 노하우를 가르치는 서울예술대 연기과 학과장이다.그는 17일 오후8시 롱아일랜드시티 시크릿 디어터(44-02 23rd St LIC,212-807-7184)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뉴욕연극제 개막작인 ‘장두이 레퍼토리극단’의 ‘노래하는 빨간 피터’ 무대에 직접 섰다.
장두이가 9년째 하고 있는 모노 드라마 ‘빨간피터 시리즈’-노래하는 빨간 피터에서 그는 빨간 곱슬머리 가발과 빨간 조끼, 줄무늬 바지를 입고 나와 아프리카 영가를 부르고 우리 춤사위를 보여주고 어니언스의 ‘작은새’, 프랭크 시나트라의 ‘뉴욕, 뉴욕, 뉴욕’, 최희준의 ‘하숙생’을 부르며 인간이 되고싶지 않은, 그러나 인간이 되어버린 원숭이의 애환을 노래했다.
일단 뉴욕에서 한국말 연극을 다양한 레퍼토리로, 여러 날동안 볼 수 있다는 점이 새롭다. 모국어가 생생하게 꿈틀대는 이 연극이야말로 한인들에게 가장 정체성 짙은 예술 행위라 할 수 있다. 우리말로 연기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장두이는 다양한 재주에 노련미, 카리스마까지, 관객과 예술로 소통했다. 극중 인물이면서 다른 존재로 수시로 변신하는 놀라운 마술성은 그를 평범한 연기자와 구분되게 한다. 그의 이 엄청난 재주와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모국어 연극은 정체성 짙은 예술행위
1952년 1월9일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한 장두이는 완벽한 무대를 위한 준비기간으로서 예술에 대한 다양한 공부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고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서울종합예술전문학교에 들어가 연극과 무용을 공부했다. 전문대에 들어가 연극을 공부한다며 선배들의 욕설과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연극에 대한 열정을 잠재울 수 없었다. 한국연극을 하면서 어찌 한국의 몸짓을 외면할 수 있으랴 싶어 무용도 배웠다. ”
1978년 라커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미국에 온 장두이는 뉴욕 브루클린 대학원 연극학 석사를 했고 그로토우스키 극단 수석배우, 로랜(Lo Lan)댄스컴퍼니 수석안무자로 맨하탄 라마마 극장 무대를 비롯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미국에 온 이듬해 ‘춘향 그리고 태을성’을 무대에 올렸고 아이리스 박과 함께 ‘알 댄스 디어터’ 극단을 만들어 ‘심청의 노래’를 비롯 1년에 두 번, 10년이상 꾸준히 공연하며 타인종과 한인들을 만났다.
뿐만 아니라 10여년간 뉴욕한국일보 방송국의 ‘뿌리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묄세’, ‘장두이의 뉴욕 데이트’ 프로그램에서 중저음의 신뢰감있는 목소리와 에너지 넘치는 진행으로 한인들의 인기를 한몸에 모았었다.
1980~1992년 코리안 퍼레이드 예술감독을 했고 미스뉴욕 선발대회 심사위원과 사회자로 한인들에게 친숙한 그는 그 시대 대표 연극인으로 독보적인 존재였다.
“뉴욕생활은 너무 힘들었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살았기에 지금도 뉴욕의 생활이 밑걸음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무대에 선다. 뉴욕에 오기 전에도 SH아트홀이 제작한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 무대에 섰다.”
당시 그의 무대는 뉴욕타임스, 댄스 매거진, 디어터 리뷰 등에서 격찬을 받았고 1979년과 1983년 오프 브로드웨이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오비(Obie) 연기상까지 수상했다. 1986년 소수민족 아시아예술인상, 1989년 아시아소수민족 예술가상도 받았다.
1995년 한국에 가게 된 것은 ‘배운 것을 후배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2001년, 2002년 대경대학과 인덕대학에서 연극과 뮤지컬 후진 양성을 위해서 강단에 선 그는 무대도 잊지 않았다.
한국에서 그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아메리칸 환갑’, ‘등대’, ‘햄릿’ 등의 연극, 영화, 드라마 등 온갖 장르에 출연하며 1995년 제31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남자연기상, 2006년 제24회 한국희곡문학상 대상을 수상했고 12개 극단의 무대에서 주역으로 공연했다.
연극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번안, 각색해서 새롭게 만든 그의 모노 드라마 ‘빨간 피터’ 시리즈는 지금까지 총 10만명에 달하는 관객을 모으며 화려한 성공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배우로서 1인극을 가장 많이 공연한 그는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틈틈이 책도 썼다. 저서로 ‘삶의 노래’, ‘아메리카 꿈나무’, ‘공연되지 않을 내 인생’, ‘장두이 희곡집’, ‘장두이의 연기실습론’ 등이 있다.
▲지금까지 무대에 서는 것은 뉴욕의 힘
장두이는 올해로 환갑을 맞으면서 1970년 배우생활을 시작한 것이 연기 인생 42년이 되었다. 그동안 220편 이상의 연극을 했다.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하고 연기해 온 그는 이 많은 것들을 모아 ‘장두이 연극박물관’을 준비 중이다. 이미 안양에 한 독지가에 의해 부지가 마련되어 한국 연극에 대한 자료를 수집 중이다.
부인 신수정은 연극음악 작곡가로 그와 많은 작품을 해오고 있다. 오는 12월 ‘아, 청아’(뉴욕 공연작 심청의 노래) 뮤지컬에서도 음악을 담당할 예정이다. 둘 사이에 중학교 2학년생인 아들이 있다.장두이는 평생의 스승으로 연극의 새로운 길을 일깨워준 이해랑 선생을 기린다. 정신적 문화유산을 남겨준 스승은 ‘연기뿐 아니라 연출과 희곡에도 매진하라’며 연극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또 한국무용을 가르쳐 준 도살풀이춤 인간문화재 김숙자 선생도 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함께 작업한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연극연출가 그로토우스키, 서울예전 학장이던 유덕형 선생은 실질적인 힘을 주었다.
장두이가 이번 뉴욕연극제를 위해 준비한 기간은 3년이다.
“전체 예산의 반은 초청자인 윌리엄 로카스(코러스 플레이어스 극단)가 부담했고 나머지는 자체 해결했다. 한국에서 극단 ‘드림’을 비롯한 3곳, 뉴욕극단 ‘지금 여기’ 등 네 극단이 이번에 참여했다.”그는 이번 연극제에서 과거 장두이를 알던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한다.
“제2의 고향인 뉴욕에 3년 만에 왔다. 젊은 시절을 보낸 뉴욕은 늘상 마음에 있고 가장 힘든 그 시절을 생각하면 힘이 생긴다. 뉴욕이 우리말 연극의 황무지지만 이번에 많이 오셔서 무대를 보고 역시, 장두이구나 하고 반겨주시면 좋겠다. 지금까지 무대에 서는 것은 뉴욕의 힘이다. 극단 ‘다은’의 ‘사진신부’(영어공연)는 한인 이민사로 가족들이 함께 보면 좋겠고 극단 ‘지금 여기’의 ‘아! 독도‘는 요즘 가장 민감한 독도 문제를 다룬 연극으로 뉴욕 초연이다.”
이번 연극제는 오는 23일까지 매일 공연 중인데 특히 토·일요일에 공연되는 ‘아! 독도’에 장두이도 나와 관객의 가슴을 울린다. “앞으로 대한민국 뉴욕연극제를 2~3년에 한번 개최하려 한다. 남은 인생을 우리 연극의 발전과 더불어 한국 연극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노력하겠다” 는 장두이는 우리의 정신과 힘을 세계에 널리 알려 예술을 통해 소통하겠다는 것이 그의 바램이다.
5년, 10년후에도 그는 여전히 희곡을 쓰고 연출을 하고 무대에 설 것이다. 그의 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온 극장 안을 가득 메우다 못해 열광의 도가니로 만드는 장면이 상상된다. 늘 무대 가까이 사는 장두이는 ‘끼와 열정이 아니라 기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한 이해랑 스승의 가르침을 오늘도 잊지 않고 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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