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0 여년 고이 간직한 주소록이 있다. 매년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이 벽에 걸리면 나는 주소록을 뒤적인다. 한 해 동안 마음속에 담았던 그리운 지인이나 친구들에게 카드나 연하장을 보내기 위해서다.
주소록은 비록 손때가 꾀죄죄하게 묻은 볼품없는 대학 노트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내가 살아 온 역사의 기록이다. 나는 주소록 속의 이들과 함께 살아 왔고 내 삶의 역사에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주소록에 기록되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지난날의 나와 깊은 사연이 있는 분들이다. ‘희- 로- 애- 락’을 함께 한 나의 생의 반려자들이다. 그래서 주소록은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이다.
나는 이 주소록을 사랑한다. 혹시라도 없어지지나 않을까 항상 내 곁에 둔다. 그리고는 옛 사람들이 보고 싶을 때나 그리움이 일어날 때면 나는 주소록을 들쳐본다.
주소록의 첫 장을 펴보면 아주 오래 전에 써서 이미 잉크 색이 퇴색되어 버린 흐릿한 이름이 하나 있다. 먼 옛날 철없던 시절 나의 첫 사랑 여인의 이름이다.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린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아가씨. 사랑이 채 익기도 전 애틋한 그리움으로 첫사랑은 끝이 났다. 지금은 아마도 60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게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주소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주소록에는 내 삶의 절반을 보낸 직장의 상사 이름도 있다. 그 상사가 그렇게 못나 보였다. 별 것 아닌 일들을 가지고 고민과 갈등 속에 시간을 보냈던 그 때의 기록을 보면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 상사의 이름도 나는 고이 간직하고 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님의 이름도 선명하게 기록되어있다. 선배님은 5.16혁명의 중심에 서 있었던 분이다. 혁명 와중에 도덕적 가치에 대한 고민을 하다 중도 하차한 분이다. 지조가 깊고 선비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선배님이시다. 어쩌면 나의 정신적 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해 로즈 힐 묘지에 계신다. 나는 선배님의 주소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내가 살이 있는 한 내 주소록에 선배님의 이름은 영원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유명을 달리하는 분들이 늘어난다. 그래도 나는 그 분들의 이름을 고이 간직하고 내 곁에 둘 것이다. 이 모든 분들이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가. 이들이 오늘의 내가 있도록 나를 이끌어 주고 사랑했던 분들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12년, 임진년의 한 해가 저물어간다.
나는 손때가 꾀죄죄하게 묻은 주소록을 펴 놓고 이름을 짚어가며 지난 날 아름답고 즐거웠던 일들을 기억하며 카드를 쓰리라. 그리고 또 한 해를 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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