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저는 인생의 여정에서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될까를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단테가 36살이 됐을 때 쓴 신곡의 ‘지옥편’에 나오는 “인생의 오후는 아침과 다르고 아침에 위대했던 것은 오후에 보잘것 없어진다. 따라서 오후를 아침처럼 살 수는 없다. 지금의 ‘나’는 곧 남은 인생의 나를 결정한다"는 한 구절을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인생의 아침에 지고 다니던 책임감과 집착으로 무거워진 가방을 열고 짐을 덜어 내려 합니다. 그 무게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했고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곳을 한 곳도 가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밀려들어 가방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려 합니다.
저는 이제 오랜 신문인 생활을 접습니다. 중간에 잠깐 외출해 동아일보를 발행했던 시간을 합쳐 근 40년을 신문사에서 일했으니 할만큼 한 셈이지요.
오래도록 저는 원숙하고 점잖으신 교장 선생님 같은 분들에게나 은퇴가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느 직장에서도 계급장을 반납할 시간은 오게 돼 있습니다. 저에게도 결국 올 것은 오고 자연스러운 퇴장이 다가와 보니 이제야 지극히 초보적인 상식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줄 모르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뒤에 오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퇴장은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입니다.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하다 끝나는 것이 인생여정이니 또한 어쩌겠습니까. 사실은 젊은 시절부터 은퇴 시까지 그렇게 좋아해 온 신문 만들기로 보냈다는 것 만으로도 큰 축복입니다.
고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워싱턴 D.C.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유태희 사장과 74년 한국일보 미주판을 첫 창간할 때는 보람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연하게 앞날에 대한 염려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의 여정에서 길을 잃는 것은 아닌지 우려도 됩니다. 홀가분해진 마음 한편에 허전함이 묻어 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지 싶습니다.
오늘 크게 인사를 올려야 할 분이 많이 계십니다. 따뜻한 관심과 격려의 말씀으로 저를 꾸준히 대해 주신 애독자, 광고주, 동포사회 리더들, 그리고 선후배, 친구들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박봉의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따르며 일해 온 직원들의 열정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변함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거나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며 같은 생각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미국 땅에 보내주신 고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님, 11년 전 워싱턴 사장으로 중책을 맡겨주신 서울본사의 장재구 회장님, LA 미주본사 장재민 회장님께도 잊을 수 없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때 편집인 시절 칼럼을 쓰고 기사를 쓸 때 유쾌하지 않은 내용으로 상처를 받았을 분들에게는 특별히 용서를 구합니다. 항상 좋은 말만 하지 못한 것은 일차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을 고백합니다.
동포사회 발전을 논의 하려는 데서 비판과 험담을 배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물론 제 탓이지만 저널리즘 종사자로서 세상만사를 사랑으로만 감싸 안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쉽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더 나은 동포사회를 만들어 보자는데 신문이란 매개체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저 백사장의 한 줌 모래였을 뿐입니다. 아쉬움은 신문인이 된 이후 제대로 자신을 뒤돌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속적 기준으로 따질 때 만성병을 얻기는 했으나 지나 온 삶의 궤적이 크게 밑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삶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아서 끝으로 갈 수록 더욱 빨리 사라진다"는 어느 작고한 대학교수의 신문집에 나오는 이야기가 요즘엔 더욱 실감됩니다.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별것도 아닌데 해답은 뻔한데 서두르고 복잡하고 힘들게 살아오진 않았나 후회도 듭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인생의 끝자락에 와서야 이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일까, 좀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와 성찰만 가득합니다.
한국일보를 사랑하는 동포들과 인연을 맺은 분들이나 관련했던 분들 모두 행복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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