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기한인 정착과정 지켜봐 온‘플러싱 터줏대감’
힐러리 클린턴, 게리 애커맨 의원과 함께.
한인밀집의 대명사인 플러싱 한인사회가 형성되던 무렵 2세들의 교육, 상가, 한인회 등 크고 작은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홍종학은 플러싱의 터줏대감으로 통한다.
커뮤니티가 발전하면서 피치 못하게 당면하는 타민족과의 관계, 말하자면 미국 주류사회와의 정치적인 교류, 공존하는 중국계와의 유대, 한인정치인들의 주류사회 진출에 팔을 걷고 나서는 등 커뮤니티 활동 37년째를 기록하고 있다. 한미부동산으로 대표되는 그의 전문인으로서의 활동도 꾸준하다. 부동산학교를 운영하면서 그간 500명 이상의 전문인을 양성했고, 1997년 재미부동산협회의 창설회장으로 이 단체는 요즘도 해마다 열리는 부동산 박람회의 주최자이기도 하다.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그의 첫 열정은 1977년 퀸즈한국학교로부터 시작됐다.
백예원 목사를 교장으로 주말 교회 한글학교로 설립된 퀸즈 한국학교의 총무, 이사장으로 봉사하면서 82년에는 약 40명의 한인 학생들을 인솔하고 모국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이 학교는 83년 퀸즈 YWCA 홍인숙 총무에게 인계되어 보다 충실한 한국학교로 발전했다.
플러싱에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퀸즈한인회의 전신인 플러싱 상인번영회가 80년에 창립되었다. 번영회는 초창기 김형락, 이종대, 김성주 등으로 이어지면서 1982년 제3대 회장에 홍종학이 선출되었다. 회장 시절, 메인스트릿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한인 소유의 야채가게, 리커스토어, 스테이셔너리, 기프트샵 등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방화로 판명된 사건의 해결을 위해 번영회가 팔을 걷고 나서 변호사, 스타비스키 주 상원의원 등을 동원해 당국에 항의를 하고 보험금을 받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모금을 통해 피해 상인들을 위로하고 이를 계기로 자체 방범망을 구축하는가 하면 관할 109경찰서와 유대관계를 맺었다. 상인번영회는 이후 플러싱한인번영회-플러싱한인회-퀸즈한인회로 진화했다.
한편 퀸즈보로청이 매년 5대륙 50개국 다민족 축제로 주최하는 퀸즈 페스티벌에 한인사회가 참여하면서 홍종학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84년 이후 5년간 퀸즈한인문화위원장으로서 한국관에 장승을 세우고 전통춤, 씨름, 윷놀이, 붓글씨 시범 등 한국문화를 보급하는 일에 열정을 기울였다. 플러싱 코로나 메도우스 파크에서 이틀간 2백만 명 이상이 참여한 이 행사에서는 한국 및 중국관이 인기를 모았다. 이를 보도한 뉴욕타임스 첫 페이지에 한국의 농악대 사진이 대표적으로 크게 실려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 축제는 재정을 감당하지 못해 중단되고 말았지만 88년 마지막 행사에서 한국의 올림픽 홍보를 엄청나게 벌였던 기억이 새롭다.
홍종학은 미 주류정치에도 깊숙이 참여, 1993년 결성된 한인민주당연합회에서 이다옥, 유은희, 최의영, 정진우, 김종률 등과 함께 활동했다. 마리오 쿠오모 뉴욕주지사, 게리 애커맨, 조셉 크라울리 연방 하원의원 등 미국정치인 후원은 물론 신호범 워싱턴주 의원 등 한인 정치인을 후원하는 행사도 벌였고 빌 클린턴 정권 때 워싱턴 나들이도 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는 홍성하, 김기호, 박윤용, 이찬우 변호사 등과 함께 참석했다.
90년대 들어 그는 때마침 플러싱에서 중국계와 별도로 진행되던 음력 설날 행사의 공동주최에 한국측 대표로 참석하여 ‘한중 합동 루나 뉴이어’ 행사의 시발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공동준비의 쟁점은 행사의 명칭이었다. 중국계는 ‘차이니스 뉴이어’를 고집했으나 한국측은 음력설의 대명사인 ‘루나 뉴이어’를 주장한 끝에 결국 ‘한중 합동 루나 뉴이어’로 고착되었다. 이때 변천수 플러싱 한인회장의 공로가 있었으며 이 행사는 오늘날에도 계속 되고 있다.
한국에서 고교 교사로 있던 홍종학의 미국 이민은 1974년에 이루어졌다. 간호사이던 부인(이영애)의 취업이민으로 미국에 입국한 홍종학은 뉴욕에서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처음에는 목수일을 7~8개월 하다가 소규모 주택을 꾸며서 팔기도 했지만 자본이 달리고 장래성이 없어 부동산 에이전트로 들어갔다. 당시 플러싱에는 60년대 중반 이민 온 송종국이 부동산을 하다가 곧 그만두는 바람에 홍종학이 이 분야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가 처음 뉴욕에 떨어졌던 76년, 뉴욕의 한인인구는 2만 명이 채 안 되는 숫자였고 플러싱은 몇 천 명 수준이었다. 초기 2년간 매클라클렌 부동산 에이전트로 활동할 때 대다수의 한인들은 아파트를 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다음으로 소규모의 점포를 임대하여 자영업을 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면서 아파트에 살던 한인들이 점차로 주택을 구입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집을 산 사람들은 또 10년 정도 돈을 모아 조그마한 투자용 주택을 찾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초기 한인들의 정착과정이었다. 그가 부동산을 시작한 것은 76년. 에이전트로 2년 반 경험을 쌓은 후 78년 말 한미부동산을 설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때 미 연방군(예비군)에 입대(1976-79년), 병장으로 제대한 경력도 갖고 있다.
플러싱의 코리아타운이 중국계에 밀리기 시작한 시기를 그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던 1997년 말부터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한인상가가 노던블러바드를 따라 롱아일랜드 그레잇넥까지 진출해 있는 상황에 대해 부동산 전문가로서 그는 나쁜 현상은 아니라고 말했다. 한인들이 영리해서 그쪽으로 잘 뻗어나간다는 평가도 있듯이 계속 진출해 간판이 걸리면서 좀 더 큰 빌딩들도 매입하고 개발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게 정답인 것 같았다.
그는 자녀 3녀1남을 두었다. 위로부터 모니카(명화)는 특수학교 출신이고, 예일-MIT 석사 졸업의 헬렌(정화)과 하버드 학부, 석사 출신의 린다(인화)는 전업주부다. 아들 레이먼드는 컬럼비아대 출신으로 한방의료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조종무<뉴저지 고문/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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