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수입보다 고객 재산 먼저...보험업계 젠틀맨
보험에 대한 정보와 인식이 희박하던 시절, 이민 1세들의 비즈니스를 도와 보험을 들게 하여 재산을 지켜주었던 임세창 보험인, 그는 여전히 현직에 있으면서 후배 보험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맨하탄 오피스에서 그를 만났다
▲보험업계 최고 고참
요즘은 차를 사거나 집을 사거나 가게를 오픈할 때 보험이 필수적이라고 인식되어 있다. 보험은 예측할 수 없는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아 재산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임세창은 75년 최초의 한인 보험 브로커로서 일을 시작하여 한 길을 걸어온 지 38년째다. 보험회사 직속인 에이전트는 회사를 대표하여 상품을 팔지만 그는 개인이 운영하는 독립적인 보험회사로 가입자의 보험 대리인이다.
보험에 관해 전문적인 공부를 하여 탄탄한 지식을 갖춘 그는 임세창 종합보험회사(2013년 (주) 아담 종합보험으로 개편)를 개설한 이래 우직하리만치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한인들에게 보험 서비스를 하고 있다. “64년 캐나다 세인트 프렌시스 세비아 대학에서 1년간 사회지도자 과정을 수료한 뒤 65년 컬럼비아대에 소셜 스터디를 공부하러 뉴욕에 왔다. 준비과정으로 1년간 영어를 공부하고 있던 중 바로 밑의 동생이 로마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강대 교수로 가면서 보험 공부를 권했다. 한국에 뮤추얼 인슈런스 컴퍼니가 아직 없던 때였다.”
그래서 임세창은 68년 세인트존스 대학원 경영대학원에 편입된 맨하탄 보험전문대(칼리지 오브 인슈런스)에 입학, 71년에 졸업했다.
낮에는 미국 뉴욕종합보험사에서 일하랴, 저녁에는 학교에서 보험공부 하랴, 정신없이 바쁘던 70년대 초 뉴욕한인사회에는 보험 상식을 지닌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가게를 차린 후 소송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보험에 대한 정보가 없고 영어도 불편한 한인들은 미국 보험회사를 찾기도 힘들었다. 화재, 주택, 자동차 등 손해보험 분야에 한인 전문인도 없었다.
“내가 보험회사에 다닌다니까 한인성당 신자들이나 주위에서 보험에 대해 자꾸 문의해 왔다. 회사에서 보험금 10만달러이상만 취급하는 부서에서 일했기에 도울 방법이 없었다.” 졸업 후 영국계 로얄 보험회사에 3년간 다니던 임세창은 결국 주위사람들의 권유와 필요에 의해 회사를 그만두고 임세창 종합보험으로 독립했다. 퀸즈 리지우드 패밀리 하우스 지하에서 아내 윤승자씨와 함께 일을 시작했다.
▲소액보험으로 한인들 재산 지켜줘
70년대초 남미로 이민 갔다가 미국으로 다시 이민 오는 한인들이 야채가게 같은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브루클린, 브롱스 등지의 잡화상, 상업용 주얼리 가게가 문을 열었다 하면 그날로 도둑이 들어 가게 물건을 통째로 털어가던, 치안이 불안하던 70~80년대였다.
“1주일에 2~3번 도둑이 들다보니 알람은 필수이고 지붕을 뜷고 내려와 물건을 훔쳐가니 지붕을 철판으로 하는 업주도 있었다. 그래서 한인자영업자들은 잡화가게나 운동화 가게 등을 열게 되면 도난보험부터 들었다.“ 브루클린에서 자영업을 하며 롱아일랜드에 사는 어떤 업주는 틴에이저 자녀가 전화를 오래 사용하니 알람이 울려도 통화 중이 되므로 아예 전화를 두 대 놓기도 했다.
워낙 도둑맞는 업소가 많다보니 연방정부가 1만5,000달러를 보증하는 연방도난보험이 시행되었다. 이때 임세창은 소액으로 가입하는 연방도난보험에 수많은 한인 업소들을 가입시켰고, 업소들이 도난 피해 보상을 받게 했다. 이로 인해 그는 1986년 카치 뉴욕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줄리아니 시장 시절 치안이 강화되면서 이 프로그램은 없어졌다)
“손해보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시절 한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좋았다. 75년 손재보험으로 출발, 76년부터 생명보험도 취급했다. 처음에는 미국회사에서 받던 연봉과 보험 수입이 많은 차이가 나서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힘들게 이민 온 한인들이 미국에서 정착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이후 뉴욕라이프에서 맨하탄 핍스애비뉴 43가에 사무실을 차려주기도 했고 현재는 6애비뉴 830번지, 한인타운에서 일하고 있다. 수십 년을 한결같이 한 길을 걸어오게 된 것은 고객들의 힘이 컸다.
“손님이 손님을 소개하고, 뉴욕시내 5개 보로에서 골고루 손님이 찾아왔다. 맨하탄에서 가게를 하다가 멀리 뉴저지로 이사 가서도 가게 보험을 들러 나오고 작은 가게가 커다란 도매상으로 성장해서도 찾아오고, 30여년간은 소매상 고객이 많았고 지금은 가게ㆍ건물 등의 상업용 보험을 주로 하고 있다”임세창의 주위에는 성공한 올드 타이머들이 많다. 혹시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장사를 할 걸 하고 후회한 적은 없었냐고 하자 그는 말한다.
“단 한번, 가발 패들러가 장사하는 곳에 따라간 적이 있다. 가발을 빗으로 빗으면서 20달러를 외치는데 나는 성격상 도저히 못하겠더라. 그들이 나중에 돈을 모아 가게를 내고 도매상을 차리고 건물을 사더라.”
“사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행복의 가치를 거기에 두지 않을 것이다.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산다.”
임세창은 사람들에게 싸고 좋은 보험을 찾아 가입시켜 주고 그들의 재산을 지켜준데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이다. 지금까지 불평하는 사람 없이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고 한번 맺어진 인간관계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자신 있는 것이 보험인의 길인 것이다.
▲후배들이 말하는 ‘젠틀맨’
임세창은 한인사회 봉사활동도 조용히 해왔다.
1995년 대뉴욕지구 한인보험재정협회를 결성하여 초대회장으로 1997년까지 일하며 협회의 기틀을 잡아줬고 현재도 이사로서 골프대회를 비롯 각종 행사에 참여하여 회원간 친목을 도모하고 독려하고 있다. 후배 보험인들은 그를 ‘젠틀맨’이라고 부를 정도로 매사 반듯하여 존경을 받고 있다.
협회는 한인들에게 보다 다양하고 질 높은 서비스를 위해 다양한 교육 세미나로 회원들을 교육시키고 매년 한번 보험관련 정보와 지식을 담은 ‘보험ㆍ재정회보’를 발간하고 있다. 그래서 한인사회와 주류 보험업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또한 그는 72년 창립된 라이온스 클럽에서 활동, 85년부터 86년까지 라이온스 클럽 회장으로 활동했고 현재는 평생회원이기도 하다.
1935년 충남 서산 출생인 임세창은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 서울시청 재무국에 근무하다가 캐나다 유학을 거쳐 미국 이민을 왔다. 부인 윤승자씨와 슬하에 2남1녀를 두었고 손주가 5명인데 4년 전부터 장남 다니엘 임이 그를 도와 함께 보험업에 종사하고 있다.
“초창기시절 아내와 둘이서 밤 9시까지 일하고 오면 딸아이가 동생들 밥을 먹이고 돌봐주어서 큰 힘이 되었다.” 결혼한 3남매가 모두 그의 집 근처인 롱아일랜드 맨하셋에 살며 수시로 식사를 같이 하면서 돈독한 가족애를 나누고 있다. “소송 천국인 미국에서 어느 날 갑자기 가게 앞에서 넘어졌다면서 소송편지가 날아들기도 한다. 그러면 변호사부터 구해야 하고, 요즘은 보험이 생활화되어 일단 가게를 열 때 보험 증명서가 있어야 랜드로드가 키를 준다. 건물보험회사가 요구하는 것이다. 보험인들이 할 일이 그만큼 많아졌다. ”
오랜 기간 보험인으로서 한 길을 걸어온 임세창은 후배들에게 노하우라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을 들려준다.“보험인의 조건은 첫째도, 두 번째도 착실해야 한다. 내 수입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고객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고객에게 싸고 든든한, 가장 적합한 보험을 찾아주어 한인사회의 재산을 증식, 보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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