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리 명석하거나 박식하지는 않았다.
그의 말투는 늘 어눌했고 큰 소리 치며 남앞에 나서는 걸 보지도 못했다. 확고한 리더십이나 카리스마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여고생일 때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미 공군에서 28년간 제복을 입고 미국을 위해 이민자로서 헌신했다. 홀로 된 노모에는 정성으로봉양한 효녀였다는 게 주위의 평이다.
한인사회에서도 가장 빛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언제나있었다. 한미여성재단의 회장, 평통의 간사와중앙상임위원, 워싱턴한인연합회 수석부회장을 지낸 그는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주로 듣는 사람이었다. 그의 귀는 늘 열려 있었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불평을 누구보다잘 들어주었다.
그렇다고 그가 ‘해결사’ 역할을 잘 수행한건 아니었다. 그 대신에 사람 좋은 웃음으로상처받는 이들을 다독였다. 어린 이들에는 누님처럼, 나이든 이들에는 다정한 누이처럼따뜻한 사람이었다.
몸에 몹쓸 병이 찾아든 만년에도 그는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한 열정을 거두지않았다.‘ 통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 워싱턴 상임대표를 맡아, 꺼져가는 삶의 촛불대신에 희미해져가는 통일의 불씨를 살리려했다.
57세의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한 그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23일 저녁. 겨울비가 내리는궂은 날씨에도 250여명의 지인들이 장례식장을 메웠다. 박근혜 대통령에서부터 여러 저명인사들의 조화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조문객들의 면모와 마음이었다.
가족을 대신해 장례식을 준비한 것은 지인들이었다. 속된 이야기지만 ‘품앗이’라는 조의금도 선뜻 냈다. 자신을 되받을 수 없다는걸 번연히 알면서 노모를 위해 지갑을 연 것이다.
식장에는 미국인들도 많았다. 미국인 남편제프 쏘페 씨를 비롯해 그들은“ 한인들이 이렇게 많이 올 줄 몰랐다”며 놀라는 표정이었다.
평소에 으르렁거리며 서로 얼굴을 맞대기싫어하던 이들도 이날은 함께 앉았다. 모두들그를 보내기 싫어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쳤다.
하나 같이 그를‘ 따뜻했던 사람’으로 기억하며 그와의 이른 이별을 안타까워했다.
한 조문객은 식장을 빠져나오며 “그는 오늘 갈라진 한인들을 하나로 만들었고, 미 주류사회에 한인들의 두터운 정을 알렸고,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이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준윤 씨가 가면서 한인들에 남긴 마지막교훈이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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