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로 힘키운 상인들 종교 속박 벗어나려 사상의 자유 외쳐
로마 바티칸박물관 입구 위의 조각상. 르네상스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인 미켈란젤 로(왼쪽)와 라파엘로의 전신상이 조각돼 있다.
대부분의 학자는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피렌체공화국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왜 이탈리아일까, 그리고 피렌체일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고대 로마제국 붕괴 이후 유럽은 침체기에 들어간다. 문명수준에서는 한창 뒤떨어진 게르만족이 오직힘으로 유럽 민족들을 지배하게 되는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계속되는 전란으로 생산력이 급격히 하락한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기독교교회 뿐이었다. 그리고 과거처럼 자유로운 사고로는 어림없는 종교적 속박이 이어진다. 이러한 시대가 1,000여년을 지속한다.
13세기 들어서면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생산성 향상으로 경제인들이 자신감을 회복했고 이를 뒷받침하면서 사상의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르네상스를 부르는 중요한 사건으로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겠다는 십자군 원정이 있다. 11~13세기거의 200년 동안 계속된 십자군 원정은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해외 진출이나 다름없었다. 원정은 실패했지만 중동 아랍세계와의 무역은 새로운 부와 사상을 가져온다. 유럽 경제의 부흥이 명백해진 것이다.
피렌체의 지정학적 위치는 절묘했다.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로마문명의 부활을 목표로 삼은 이상 로마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있던 이탈리아가 우선 유리해진다. 프랑스나 독일·영국 등은 로마와 여전히 상관없는 곳이다.
중세 기독교 시대에는 기부와 십일조 등을 통해 로마교황청에 막대한 자금이 몰렸다. 근처에 있는 피렌체 은행가들이 이를 관리하게 된다. 메디치 가문이 이들 은행가 연합의 대표격이다.
유럽의 패권을 둘러싸고 종교계 수장인 로마교황과 정계 대표인 신성 로마제국 황제가 대립하는데 피렌체는 이 싸움에서 한 발짝 비켜설 수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5대세력 가운데 밀라노와 나폴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지배됐고 교황령은 교황의 지배 하에 있었다.
베네치아는 내전과 동떨어져 동방과의 무역에 열중했다. 피렌체는 교황과 황제의 가운데 끼어 있었다.
피렌체가 이 대립의 와중에 경제인·상인의 힘을 키우며 자신들에게맞는 사상을 만들어낸 것이 르네상스라고 볼 수 있다. 중세 1,000년을‘암흑시대’라고 이름 붙인 것은 14세기에 활동한 피렌체 출신 시인 페트라르카다. 르네상스에 대한 찬양이 이전 시대에 대한 부정으로 표현된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공화국의중 심이었던 시뇨리아 광장에 서면 고대로마의 포로로마노와 비슷한 민주적 광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대상인·은행가들이 지배하지만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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