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백년 전 1915년 1월 27일에 경상남도 진주의 정숙여학교 고등과 학생 천연희(千年凞) 사진(는 일본 총독부 외부에서 발급한 여행권을 받았다. 19번 째 생일 이틀 전이었다. 그로부터 5달 후인 6월 20일에 호놀룰루 이민국 숙소에 여행 짐을 푼 천연희의 하와이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102살에 사망할 때까지 13개의 캐셋 테이프와 7권의 공책에 자신의 이야기를 남겼다. 천연희가 남긴 자서전적 생활문화기를 토대로 필자의 조사 자료를 보태 천연희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천연희 자신의 글을 요약하여 ‘ ‘ 안에 넣었다.
<편집자 주>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 커렐(Hugh Currell) 부부가 1907년 9월 3일에 진주군 대안면 2동에 있던 예수교 예배당 (현 진주교회)에 정숙(貞淑)학교 (여)를 설립하였다. 천연희가 이 정숙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나라가 일본에 병탄되어 ‘우리나라가 자유가 없어지고, 일본 정치 밑에 압제를 받고, 우리 역사와 나라 사상을 압박하였다. 일본만이 천하의 제일이라 가르치고, 그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옥중에 가두고 무수한 벌을 주어 병신이 되었다.’ 천연희는 1912년에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계속하여 고등과에 다녔다. 한국 역사 대신에 일본 역사를 배워야 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통곡하였다. 공부 도중에 일본 순사가 오면, 책을 다 숨기기도 했다. 또 성경 공부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자유 없는 나라 백성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하였고,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신문에 마산과 부산에서 여자들이 사진혼인으로 미국 영지(영토) 하와이로 많이 간다는 기사가 났다. 같은 반 친구들은 외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하여, 자세히 알아보자고 했다. 천연희가 75세에 친구 이름을 박보염, 강신애, 남경애, 강점수, 강애경, 하은혜 라고 기억했다. 1914년 여름에 남경애가 사진결혼하여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박금우의 아버지 박태구의 마산 집을 찾아가 하와이 사진신부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고,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박태구에게 주고 왔다. 박금우는 일찍이 마산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사진혼인 하여 하와이로 간 후에 부모를 많이 도왔다. 당시, 부산과 마산 등에서는 벌써 하와이로 사진신부들이 많이 갔는데, 진주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남경애의 이야기를 듣고 같은 반 친구들도 모두 하와이로 가기를 원했으나 부모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박금우는 1913년 초경에 정시준과 결혼하였다. 호놀룰루의 2세 멋쟁이 할머니 마가렛 정 (2015년 현재 94세)의 시어머니이다. 남경애는 1915년 초에 한장춘과 결혼하였다. 불교 신자였던 천연희의 어머니 이애기는 4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 4명과 딸 3명이 죽고 큰 딸과 막내딸 천연희만 남았다. 진주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이애기가 ‘예수교를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또 모든 환란을 면한다’는 전도 내용을 시장에서 듣고 왔다. 그는 ‘내가 불교를 잘 믿는 사람인데 내 자식이 단명하니 너는 예수를 믿어 장수하라’고 천연희를 성경학교에 보내서 12살 (1908)에 세례를 받게 하였다. 세례명은 에스터 인데 천연희는 이 세례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연희를 정숙학교에 다니도록 하였던 것이다. 천연희가 사진혼인에 대해 얘기하면서 하와이에 가겠다고 했을 때, 딸의 장수만을 빌었던 어머니는 ‘네가 하와이에 가서 장수만 하면 된다.’고 하와이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천연희 아버지 천운서는 천연희가 12살 되었을 때 돌아가셨지만, 집안은 영남지역에 알려진 부자였다. 천연희는 말을 타고 마산의 박태구 집을 찾아가서 하와이에 사진신부로 가도록 주선해 달라고 했다. 박태구는 부자 집 딸 천연희의 부탁에 깜짝 놀랐으나 마산에서 찍은 사진을 박금우에게 보내 주었다. 진주로 돌아 와서 계속 학교를 다니는 중에 체전부 (우체부)가 가져온 편지 속에 마우이 섬 파이아(Paia)에 사는 길찬록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을 보고 간이 떨어지는 것처럼 두군 거렸다. 사진 속의 사람이 흉하지는 않았고 나이도 30여세 정도로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하와이 남자들이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다행히 길찬록은 그리 나이가 많은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의 기쁨이라는 것은 없었다.’ 물론, 길찬록이 옛 날 사진을 보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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