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곧 혼인신고를 하고 여행권 (여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여행권을 신청할 때 순사가 문답을 하고, 의사에게 대변검사 (십이지장충)검사와 눈 검사를 받도록 하였다. 의사의 진단서를 검사국에 보내고 음력 정월 (1915년 1월 27일)에 일본 총독부 외부에서 여행권이 나왔다. 19살 생일 이틀 전 날이었다. 선생님께 하와이에 가게 되었다고 흥분하여 말씀 드렸더니 호주에서 오신 시 선생님(Nellie Scholes 施童貞)이 ‘너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집안인데, 왜 보지도 못한 사람하고 결혼하러 가느냐? 더구나 하와이에 간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한 농민들이라면서 가지 말라고 크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자유의 나라 외국에 갈 희망으로 사랑이고 무엇이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와이 한인의 사진신부, 사진결혼이 어떻게 시작 되었는가를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일본인의 하와이 이민은 하와이가 왕국이었던 1885년부터 노동계약으로 시작하여, 1900년 하와이에 61,000 여명 (여자 13,600 여명 포함) 이 하와이에 살고 있었다. (하와이왕국은 1893년에 망하고 1898년에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일본인은 하와이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에도 많이 살고 있었는데, 1907년에는 5만 명이나 되었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지도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다 민족, 다문화 사회인 하와이와는 달리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아동이 백인 아동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도록 하는 인종차별이 시작되었고, 캘리포니아 주는 일본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없는 법까지 제정할 정도가 되었다. 미국 정부는 일본인 배척성향이 더 심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1907년 1908년 사이에 일본과 신사협정을 맺고, 일본정부가 더 이상 미국으로 가는 일본인에게 여권발급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즉 미국정부가 일본인의 미국 입국을 중단하는 이민법을 제정한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가 자국민의 미국 이민을 중단 하는 상호체결을 한 것이었다. 이로써 미국 연방정부는 캘리포니아 주를 위시한 여러 주(州)가 일본인 배척법을 제정하는 것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참고로, 중국인의 미국입국은 이미 1882년 중국인 배척법으로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 신사협정에 따르면 이미 미국에 와있는 일본인들의 두고 온 가족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는 허점이 있었다. 이 기회에 일본 노동자들은 두고 온 식구들은 물론 결혼할 신부를 데려오는 방법을 쓰기 시작 하였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사진을 교환하여 결혼 결정을 지은 이른바 사진결혼이었다. 결혼하기로 약속을 한 사진신부들이 도착하게 되었는데, ‘사진신부’라는 단어는 영어 ‘picture bride’의 한글 번역어이며, 일본에서는 샤신하나요메(寫眞花嫁)" 라고 부른다. 물론 일본 사진신부들이 하와이에도 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도착한 초기에 신부들은 이미 고향에서 서류상 결혼을 마친 경우도 있었으나, 이민국 직원들은 새 신부들이 글자 그대로 결혼식을 올린 후에야 이민국을 떠나도록 고집하였다. 그래서 불교나 신도(神道) 승려들이 이민국에서 약식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일본인들의 반발이 컸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 사진신부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민국은 즉석 결혼식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1908년부터 1923년까지 하와이에 도착한 일본인 사진신부는 약 14,300명이다. 한편, 1918년에 약 5,300명의 일본인 샤신하나요메가 캘리포니아 주에 도착하였고, 이들이 창녀(娼女)인가 아닌가 여론이 좋지 않게 되었다. 드디어 1920년 미국과 일본 정부는 “신부협정”을 맺고 일본 정부가 새 신부들에게 여권을 발급하지 않게 되었다. 하와이는 예외로 샤신하냐요메들이 계속 올 수 있었다. 대한제국이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에게 병탄되면서 대한제국 신민이 일본의 속국인이 되었고, 외국으로 여행하는 한인들은 일본여권을 발급 받았다. 1910년 12월 2일에 첫 한인 사진신부 최사라 (당시 23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신랑은 사업가 이내수 (당시 38세)로 국민회 창립회원이며, 또한 자유교회의 창립교인이었다. 민찬호 목사가 이민국에서 혼례식을 거행하였다. 이로부터 1924년 미국의 동양인 배척령으로 모든 동양인의 입국이 중단되기까지 약 800명의 한인이 일본여권을 갖고 하와이에 도착하였는데 그 중 680명이 사진신부였다. 한인 사진신부는 하와이뿐만 아니라 미주 본토에도 갔는데, 1920년 후에 일본인 샤신하냐요메 처럼 본토로 갈 수 없었는지 앞으로 조사가 필요하다.
이 기간에 온 대부분의 한인들을 위하여 하와이에 있던 남편이나 신랑이 호놀룰루 소재 일본 영사관에 가서 신청하여 발급받은 일본 여권과 선비(船費)약 $50을 한국으로 보냈다. (일본 영사관은 1908년부터 베레타니아와 퍼트 스트리트 모퉁이의 3층 건물에 있다가, 1913년에 현 누우아누 애베뉴 1742번지로 이전하였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하와이에서 길찬록도 천연희의 여권을 신청하여 1914년 10월에 여권을 발급 받았지만, 선비를 보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서 여권도 선비도 못 보냈다. 이것을 모르고, 천연희 자신이 진주에서 여권 신청을 하여 받았던 것이다. 천연희의 여권 왼쪽에 적혀있는 빨간 글씨의 “경상남도 경무부 하부(下部)” 가 이 여권이 한국에서 발급받은 것임을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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