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천연희가 배를 타러 마산으로 떠나는 날 어머니와 언니가 남강 건너 자동차 정거장까지 데려다 주시면서, ‘10년만 살다가 환국하여 내 죽기 전에 보자’고 대성통곡 하셨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가 통곡한다.’고 1980년에 천연희는 기록하였다.) 언니도 ‘둘도 없는 내 동생, 어머니 생전에 돌아오라’고 했다. 박태구의 아들 (박금우의 오라버니: 천연희도 이 분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다)의 안내를 받으며, 마산에서 부산으로 가서 연락선을 타고 하간(下間 시모노세키)에 내렸다. 사진결혼을 알선하여 준 대가로 박태구에게 $60 상당의 ‘소개비’를 이미 주었는데, 박태구가 동행할 수 없어 아들이 대신 동행한 것이다. 그 곳에서 직경차 (기차)를 타고 하루 걸려 신호(神戶 코베)에 도착하여 대복(大福)여관 (일본인 소유)에 들었다. 다음 날 대복여관에서 주선하여 준 이민 관련 의사에게 눈 검사와 대변 검사를 받으러 갔다. 때 눈 검사는 1 주일에 한번 씩 할 수 있었고, 대변 검사는 약을 먹고 2 주일 후에 하도록 되어 있었다. 박 오라버니는 환국하였다.
천연희는 이 분이 “점잖고 씩씩한 청년이라 장래에 상당히 (크게) 될 줄 알았다”고기록했는데, 천연희는 박 씨가 후에 목사가 된 것을 알았다. 대복여관에는 천연희 외에 5명의 사진신부와 유학생 남자 청년도 묵고 있었다. 신체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이들과 시내 구경, 등산 등을 하면서 지냈다. 2 주일 후 대변 검사에 불합격되어 다시 약을 먹고 2 주일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 하와이에서 온 남자가 한국으로 가는 길에 여관에 묵게 되었다. 나이도 많고, 보기에도 ‘농민 태 [티]’가 나고, 무식하였다. 같이 있던 사진신부 김순남 (김관옥과 결혼), 박달순 (서기운과 결혼), 최소근 (한춘덕과 결혼), 이시남 (양희과 결혼), 남순남 등 모두가 깜짝 놀랐다. 하와이 소식을 물었더니 자기는 하와이에서 농장 주인의 마방간 (마굿간)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했다고 ‘마치 장한 것 같이 자랑하였다.’ 천연희는 이 남자를 보고 아주 낙망하여 일본에 온지 20일이 되었을 때 진주로 돌아갔다. 학교에 갔더니 같은 반 친구들은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연희는 시험을 볼 수 없었고, 친구 남경애는 벌써 하와이로 떠난 후였다. 할 수 없이 ‘이왕 시작한 일이니 자유 찾아 간다’ 하고 다시 코베 대복여관으로 갔다. 이번에는 대변검사에 통과하였으나, 배에 자리가 없어 또 2 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하와이 길찬록이 아직도 돈 (배삯)을 보내주지 않았고, 가지고 온 돈이 떨어졌다. 돈이 없는 길찬록이 호놀룰루에서 발급받은 여권과 함께 돈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과 관련하여, 천연희는 어떤 신부는 하와이에서 돈이 왔는데 부모가 돈을 쓰고, 딸은 하와이로 보내지 않은 경우도 있고, 일본 여관에 빚을 지고 떠난 신부들도 있다고 기록하였다. 천연희는 진주 집에 편지하여 돈이 왔는데 1 주일 만에 다 썼고, 할 수 없이 집에 또 편지하여 돈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여권의 6개월 기한이 가까워 왔다. (여권기한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그 때 코베신학교에 유학하는 유홍진이 대복여관 주인의 통역을 맡아 주고 있었다. 유홍진과 의논하여 여관에 남아 있는 남순남에게서 돈을 빌려 여관비를 내고, 집에서 오는 돈으로 갚아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집에서 돈이 안 오면 남순남이가 떠나지 못할 것 같아 걱정되었다. 6월 9일에 하와이로 가는 시베리아 호를 타고 횡빈(橫浜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는데, 탁하순 (김성칠과 결혼)과 이시남, 그리고 서울에서 온 부인 3명이 배에 올라왔다. 6월 20일에 배가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다. 노란 완장을 찬 검사장들이 작은 배를 타고 시베리아호에 올라와서 선객들을 살피고 나간 후, 선객들이 작은 배로 갈아타고 (천연희는 ‘아직도 시설이 부족한 까닭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선창에 내렸다. 한 참 걸어서 이민국으로 안내를 받아 갔다. 이민국은 옛날 (낡은) 집으로 그 안에 넓고 큰 방에 쇄로 된 2층 침대 여러 개가 있어 여자 5명이 그 방에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종을 흔들어 다른 방에 있던 일본 여자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서 식당으로 갔다. 쌀밥과 일본 무 (단무지), 생선회와 미소 숩 (일본 된장국)이 나왔다. 생선회를 간장에 비며 먹으니 비릿 내가 났지만, 다른 반찬이 없어 그대로 먹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사진신부들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사진으로 정혼한 남자들이 와서 데려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참고로, 현 595 알라모아나 블러바드 595번지의 이민국은 1934년에 건축되었고, 1915년경에는 현 700 리차드 스트리트 700번지 자리에 있었다. 그 이전 1910년경 까지는 이민국이 샌드 아일랜드에 있었다. 1903년에서 1905년까지 온 한인 이민자들은 샌드 아일랜드 이민국을 통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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