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천연희는 마우이에 도착하면서 곧 국민회 회원이 되었다. 천연희는 국민회가 “우리 백성의, 이민해 들어온 백성의 기관족(조직)” 이었다고 기록하였다. 길찬록이 국민회 회원이었고,《국민보》와《태평양잡지》를 구독하고 있었다. 호놀룰루에는 국민회 총회가 있었고, 마우이, 하와이, 카우아이에는 지방 국민회가 있었다. 매해 정월에 대표회의가 호놀룰루에서 열리는데, 각 지방에서 “똑똑하고 말 좀 하는 아저씨를 가수결로 선택하여 호놀룰루로 보냈다. 지방회에서 선비(船費)와 밥값 등 경비는 부담해 주었으나, 1주일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일을 못하여 임금을 벌지 못하는 불이익이 있었으나 백성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지방 대표들은 기꺼이 참석하였다. 대표회의에 보낼 지방의 안건은 가수결로 결정하여 대표로 하여금 대표회의에 건의하도록 하였다. 1914년에는 길찬록이 마우이 대표로 참석한 것으로 천연희는 알고 있는데, 확인되지 않았다. 천연희는 1919년 4월에 조직된 부인구제회의 마우이 섬 부인구제회 회원이 되어 평생을 부인구제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부터 1954년까지는 부인구제회 (동지회 계열)의 서기였다. 또한 1921년 동지회가 조직되었을 때부터는 동지회 회원이었고, 1925년에 동지촌 설립을 위해 동지식산회사 주식을 팔았을 때 $100 씩의 주 5주를 사는 등 동지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30년 자금 부족으로 동지촌이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에 $100 후원금을 내기도 하였다.
1928년에 경상도에서 온 사진신부들이 위주가 되어 영남부인회가 조직되었다. 경상도 진주에서 온 천연희도 모임에 참여하였으나 곧 이 조직이 지방 감정으로 조직된 사교 단체인 것을 알고 고만 두었다. 천연희는 지방 감정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요소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천연희는 박용만을 존경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박용만에게 어디 사람이냐고 물을 때 그가 “나는 부여 민족이요, 한국 사람이요, 한국 백성이요”라고 대답하면서 지방색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였다. 천연희의 단체활동이 남다른 것은 국민회, 교민단, 동지회 등 단체의 활동역사를 완전히 이해하였고, 또한 자신의 견해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활동뿐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박용만의 활동에 관하여 ‘박용만은 군무대학 마치고 하와이로 와서 카할루에 군무대를 만들어 동포를 조련하고 군인으로 양성하는 일을 하였다. 박용만씨 같은, 저런 좋은, 저런 용기스러운, 저런 국민, 저런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망해갈 때, 쇠퇴해 갈 때, 약할 때 생겨서 나라를 건지었으면 좋지만, 지금은 때가 늦었구나! 오호라 시대여! 우리나라는 벌써 일본의 속국이 되었는데, 하와이의 다 늙은 아저씨들을 군무를 교육하면 무엇을 할꼬! 시간 허비고, 재정 허비다.’ 라고 안타까워하면서 기록해 놓았다. 천연희는 《국민보》와 《태평양잡지》를 다 구독하였는데, 《태평양잡지》에는 ‘절절이 우리가 배워야 되고, 알아야 할 세계 소식들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이런 잡지를 출판하는 이승만 박사는 ‘국민을 교육시키는 참 애국자였다. 《태평양잡지》는 ‘애국하는 마음과 정치의 정신을 국민에게 많이 주었다.’ 천연희는 아마도 이승만을 8살 때 진주교회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1912년에 커렐 목사의 초청으로 이승만 박사가 진주 예배당에서 설교하고 커렐 목사 집에 머물다가 서울로 갔다. 곧 이승만의 목을 베어오면 만원을 상으로 주마한다고 신문에 크게 났다.’ 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그 때 이승만을 본 것을 기억하였는지 아니면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천연희는 이승만이 독재한다고 민중화를 외친 김현구와 김원용에 대하여 가차 없는 비평도 내렸고, 1959년에 출판된 김원용의 『재미한인오십년사』 를 읽고 사실이 아닌 것이 많음을 지적하였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사진신부는 천연희 뿐이라고 생각된다. 천연희는 ‘김원용이 8년에 걸쳐 자료를 조사하고 그 책을 썼다는 것은 인정해 주지만, 나 자신은 1915년에 하와이에 와서 계속 살았기 때문에, 그 책에 사실이 아닌 것이 많은 것을 안다. 이승만을 반대하는 김원용의 양심 (마음)이 들어나서 그 글의 가치가 없게 되었다.’ 라고 평하였다. 동시에 ‘이후에 이승만씨 역사가 저술되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나는 나의 일평생에 지내온 사실을 쓰는 것이다.’ 라면서, 김원용의 잘 못된 기술을 지적하였다. 한길수에 대하여는 ‘그를 공산당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고 한길수가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잘 보았다.’라고 하였다. 천연희는 국민회 회원 중의 ‘충직한 애국지사들’의 이름도 기록하였고, 감리교 감리사 프라이, 그리고 이승만을 많아 도와준 딜링햄, 보트윅, 스타블르틴지 사장에 관하여도 기록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승만이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였을 때 ‘대부분의 한인 감리교 목사들이 반대한 이유가 감리교에 속하여 월급을 받기 때문’이라고 서술한 것이다. 또한 경제적 곤란을 받고 있던 교회를 다른 교파에 팔려고 했던 한인기독교회 목사 이용직에 대하여도 잊지 않고 기록하였고, 여성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한인 YWCA의 황혜수와 한인기독학원의 김노듸에게도 고마움을 표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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