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천연희가 1967년 9월 26일부터 2 주일 동안 고국 방문단과 함께 고국을 찾았다. 52년만의 첫 방문이었다. 방문단의 일정에 따라 명소를 찾아다닌 후 자유 시간이 주어졌을 때 고향 진주에 갔다. 물론 친정어머니와 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지만, 사촌 등 친척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천연희는 진주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고, 동창생 3명을 만나 회포도 풀었다. 52년 만에 고향에 가서 다니던 교회를 찾아 간 사진신부는 천연희 뿐이라고 생각된다. 천연희는 1980년 4월에 <하와이 노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한글을 읽을 수 있는 60세 이상 노인들을 위한 2년의 과정을 시작하였는데, 첫 해에 20여명이 입학하여 매주 토요일 2시간씩 2년의 과정을 마치고 1982년 3월 27일에 제1회 졸업식을 가졌다. 졸업자 20명 (남자 9명과 여자 11명) 중에 천연희와 황원태 (남)가 최고령자로 86세였고 이 둘 만이 20세기 초 1세대 이민자였다. 다른 이들은 1965년 미국의 새 이민법 실행 이후에 왔다.
1914년 진주의 정숙학교 고등과를 다니다가 사진결혼으로 온 천연희는 한자와 한글 서예를 배웠고, 생활 영어를 배웠다. 무엇보다도 평생 원했던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또 새로 이민 온 친우들과 자신의 옛 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같이 울고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1981 년에 우등상과 협력상을 받았고, 1982년 졸업식에서 졸업장과 대학발전에 기여한 공로상도 받았다. <글을 마치면서> 하와이 사진신부 도착 105년이 되는 이 시점에 공개하는 천연희의 이야기는 사진신부 자신이 기록해 놓은 자서전적 생활문화기로 하와이 이민사 연구에 보석 같은 자료이다.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문체를 바꾸지 않고 살린 것은 사진신부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하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천연희가 남긴 기록은 앞으로 연구해야 할 하와이 사진신부사 (寫眞新婦史)의 시작이다. 천연희가 자서전적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75세인 1971년부터이데 약 5년 동안 계속하였다. 그의 기억력에 놀라고 또 그의 관찰력과 생각에 놀랄 수밖에 없다. 하와이로 오는 길에 머무른 일본에서 구경을 다니면서 보고 느낀 것을 ‘일본 사람은 가는 곳곳을 인적으로 강산을 이쁘게 만들어서 외국사람 보기에 좋다는 물망을 얻게 되었다. 철도도 대단히 잘 건설되었고, 상점도 많고 건물도 잘 지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결혼 전 날 구경하고 온 와이키키에 관하여도 기록하였다. ‘와이기기가 물구덩(슾지)이고 청국인(중국인)들이 오리를 키우고 있었다. 낡은 시사이 여관 [시사이드 Seaside Hotel] 이라는 것이 있고, 무아나 [모아나 Moana] 호텔은 새로 지었고, 작은 점방이 몇 개 있었다. 땡땡이 전차가 다니고, 폿카 [포드 Ford 자동차]가 가끔 있고, 마차가 손님을 태우고 다녔다.’ 천연희는 일본 여성과 한인 여성의 차이점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 친구들 중에는 우름 [룸 room] 집세 놓는 사업을 하는 이가 있다. 일본 사람들은 조그만 가게 전방을 내고 오전, 십전 장사를 한다. 시간이 지루하다. 아침 6시에 가게 문을 열고 밤 9 점에 가게 문을 닫는다. 한인들은 (가게를 지키는) 시간이 지루하여 그리 참고 하기 싫어한다. (한인은) 집 세놓는 장사를 좋아한다. 집 세놓는 장사는 아침에 시작하여 치워주면 오후 2점이면 다 할 수 있고, 시간이 있다 (남는다). 그 시절에는 청국 (중국) 사람이나 백인 사람의 집을 몇 해 약조하고 세를 사서 (임대계약을 하고) 방을 꾸미고 세를 놓아 이익을 노는 것이다. 여관을 만든 것이다. 우리 한인 동포들이 그 사업을 많이 잘 하여서 돈을 많이 모았다.’끝으로,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천연희의 딸 Mary Khil Zarbaugh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매리는 1919년에 마우이 농장에서 태어나서 미주 본토 학교에서 가르친 1-2년을 빼고는 75년이 넘도록 어머니 곁에 있었다. 알코홀릭 아버지를 아버지라 생각한 적이 없도록 싫었고, 계부에게서는 미움을 받고 매도 많이 맞았다. 어머니가 하숙집을 운영할 때는 싫은 방 청소를 해야 했고, 카네이션 농장을 운영할 때는 매일 아침 꽃을 실어다 레이 상점에 팔아야 했다. 어머니의 힘들었던 삶의 이야기를 틈틈이 녹음했고, 초등학교 교사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어머니의 23개 녹음테이프 하나하나를 영어로 요악하여 공책에 써 놓았다. 어머니 천연희는 한글로 세로쓰기로, 딸 매리는 영어로 가로쓰기로 썼다. 그 어머니의 그 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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