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사진제공 : 스탠리 후지이, 번역 : 손수현, 유미영
<지난 주에 이어 계속>
때로는 산에서 내려가 다른 병사들과 트럭을 타고 목욕을 하러 임진강에 가곤 했습니다. 간만에 하는 목욕은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임진강 유역은 조용했지만 먼 곳에서 포탄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곤 했습니다. 한번은 목욕을 하는 동안 내 옆으로 시체 한 구가 천천히 떠내려 왔습니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군복을 입은 시체였는데, 나는 깜짝 놀라 시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쳐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강 상류에서는 전쟁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끔찍한 순간이었습니다. 전쟁의 공포는 군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이러한 경험들은 절대 잊히지 않습니다. 어느 날 적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초계임무를 수행하던 중 하늘에서 독수리들이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날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언덕 위에 시체 몇 구가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군복을 보니 중국군 이었는데, 미국 전투기가 투하한 네이팜탄 의 뜨거운 화염으로 인해 군복은 거의 타버렸고 몸뚱이도 마치 석탄처럼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죽은 군인들은 한 14살, 15살 정도로 보였는데 벌어진 상처 틈사이로 구더기들이 득실거렸습니다. 정말 구역질 나는 장면이었고, 나는 치명적인 포탄을 피해보려고 하다가 죽은 이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후 내 꿈은 악몽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북한군 군복을 입은 꽁꽁 언 시체 한 구를 산 위로 옮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보낸 남한 측 첩보원이었습니다. 첩보원을 하려면 순발력과 민첩성, 재빠른 상황판단 능력이 필요하며 만일 실수를 하거나 적에게 발견되면 고문을 당하고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임무수행을 무사히 마친 첩보원은 야밤에 몰래 빠져 나와 지정된 장소로 가는데, 너무 일찍 도착하면 밤에 귀대하려고 했다가 적군으로 오해 받아 총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가 아군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동이 트면 첩보원은 손을 들어 연합군에게 신호를 보내고, 문제가 생기면 암호를 외쳐야 했습니다. 슬프게도 내가 보았던 꽁꽁 언 시체의 주인공은 차가운 땅 위에 누워 해가 뜨기를 기다리다가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군인들은 이렇게 위험한 첩보 임무에 끊임없이 지원하였습니다. 나는 따뜻한 열대지방에서 자라 뜨거운 여름 날씨에는 익숙하였지만 황량한 산속에서 극한의 추위를 견디기는 힘들었습니다. 두꺼운 양말과 전투화를 신어도 눈밭을 걸으면 발이 순식간에 얼어버렸습니다. 나는 동상을 피하기 위해 종종 부츠를 벗고 발을 주물렀습니다. 같은 소대에 있던 한 동료는 발에 괴저 가 생겨 입원해야 했는데, 그 동료가 양말을 벗을 때 피부가 썩어서 발목부분 살까지 함께 벗겨져 버렸습니다. 변색되고 감염된 발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이를 보고 다른 병사들은 날이 추우면 언 발을 잘 마사지해주고 양말도 자주 갈아 신었습니다. 최전선에 서면 폭격과 사격으로 부상을 입거나 죽을 위험에 노출됩니다. 나 또한 죽음을 직면한 순간이 있었고 그때에는 정말 내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는 적군과 아군지대 사이에 ‘무인지대’에 있던 전초기지를 습격한 밤에 벌어졌습니다. 기습조에 속해있던 우리는 달도 뜨지 않은 깜깜한 여름 밤 숨죽이고 야지를 지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굉장한 폭발음과 함께 밤의 정적이 깨졌습니다. 누군가가 지뢰를 밟은 것입니다. 순식간에 하늘에 형광색 조명탄이 번뜩이더니 뒤이어 적색 예광탄과 총알,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지뢰밭으로 변해버린 질척거리는 논 한가운데서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후퇴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뢰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주 천천히 온 길을 되짚어갔습니다. 그날 밤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출발 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높은 제방 뒤에 웅크리고 숨을 수 있었습니다. 아군 탱크는 논 건너편으로 대포를 쏴서 우리가 재정비를 하고 기지 근처로 후퇴할 때까지 방호사격을 해주었습니다. 지뢰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획한 이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이렇게 끔찍한 수난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는 내가 봐도 행운아였습니다. 나는 1952년의 크리스마스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 나는 특별한 휴일을 맞아 적군도 잠시 쉬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휘잉하고 대포가 날아오는 소리가 나면서 아침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나는 우리 부대가 대대적인 공격을 당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파편이 아닌 전단지가 흩어져 내려왔고 내 벙커 옆으로도 한 개가 떨어졌습니다. 중국인민지원군이 미군들에게 보낸 전단지에는 영어로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 (메리크리스마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사진) 여기에는 우리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선전용 문구도 쓰여 있었습니다. 이후 하루가 조용히 지나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적들의 다음계획을 몰라서 긴장하면서 경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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