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에 태어난 갓난아기들이 어느새 65세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6.25 전쟁 때의 참혹하고 배 골았던 이야기를 하면 손자는 “라면이라도 끓여먹지 왜 그랬느냐?”며 이해를 못한다. 영국의 사학가 토인비는 한세대를 30년으로 잡았는데, 두 세대가 넘은 사건이니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6.25 전쟁은 끝나지 않아 불안한 지경이다. 따라서 이 전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전쟁세대는 전후세대가 간접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6.25 한국전쟁은 세계2차 대전이 끝난 지 5년 후, 마치 동서냉전과 갈등의 축소판처럼 한반도에서 공산당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적화하기 위해 기습 남침한 것이다.
당시 주변정세는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이 국민당의 장개석을 물리치고 중국대륙에 공산정권을 세웠다. 반면에 미국은 한반도의 안전이나 아시아의 평화를 고려하지 않고 소련의 책동에 말려 1949년 6월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시켰다.
뿐만 아니라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1950년 1월12일 태평양 방위권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북한 공산당의 김일성이 남침할 호기를 간파하게 된 것이다.
북한 공산당은 치밀하게 남침계획을 세우고 소련 스탈린의 승인과 중국 마오쩌둥의 지원약속을 받아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를 기해 38선을 돌파하여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그들은 아군보다 2배나 많은 19만8,380명의 병력, 아군은 1대도 없는 242대의 전차와 아군보다 2배나 많은 285문의 포 등 절대 우위의 전투력으로 공격해 왔다.
UN은 이를 막기 위해 1950년 7월1일 맥아더 원수를 UN군 통합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참전 16개국 전투부대와 24개국 군수지원 부대를 총 지휘하도록 했다. 맥아더 장군은 ‘후퇴작전과 망치머루 작전개념’으로 전쟁을 수행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53년 7월27일 이왕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으니 ‘북진통일’ 하자며 휴전을 반대한 한국군 대표가 불참한 채 UN군 대표와 북한군, 중국군 대표가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휴전이 되었다.
전쟁에 소요된 전비 150억 달러는 미국이 전담하였다. 이 전쟁으로 한국의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한국군의 인명피해는 전사 5만8,127명, 전상 17만5,743명이 발생했다. 미국군은 전사 3만3,629명, 전상 10만3,284명 그리고 기타 UN군은 전사 744명, 전상 2,583명이 발생했다.
한국국민도 사망 24만4,663명, 학살 12만8,936명 그리고 1천만 이산가족과 8만4,532명의 고아가 생겼다. 그리고 참혹하고 암담했던 적 치하와 피난살이는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반면에 적의 피해는 전사자만 북한군 32만2,170명과 중국군 34만2,294명이었다.
고래로부터 한반도를 두고 중국은 ‘순치지국’이라 하여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했고, 러시아는 ‘부동항’ 이라 하여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남진정책에 심혈을 기울여 왔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6.25전쟁 65주년을 맞이하여 그간 끊임없는 북한의 도발을 돌아보며 “휴전은 다음 전쟁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던 이승만 대통령의 통찰력 있는 담화를 뼈저리게 실감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