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P,‘안나산 기도원 살인사건’희생자 부인 고애숙씨 인터뷰 게재
지난 달 메릴랜드 프레드릭 카운티 소재 안나산 기도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은 한인사회는 물론 미 커뮤니티도 큰 관심을 가질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한인 크리스천들이 주로 찾는 영성 훈련 및 쉼터라고 볼 수 있는 기도원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확인 결과 범인 김송수는 조울증을 앓는 정신질환자였음이 밝혀져 전후 상황은 파악이 됐지만 가해자 및 피해자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한인 커뮤니티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인 교회와 연관된 시설에서 한인 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는 면에서 한인사회 전체에도 어쩔 수 없이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게 됐다. 워싱턴 지역 한인사회가 겪었을 간접적인 트라우마를 의식한 듯 워싱턴포스트는 18일 메트로판 1면에 희생자 박충환 장로의 부인 고애숙 씨와의 인터뷰 기사를 장문으로 실었다. 고인이 된 남편의 영정을 들고 굵은 눈물을 흘리는 고 씨의 큰 사진과 함께. “이제 계획은 깨졌다”는 다소 절망스런 제목이 달려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고 씨는 도대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박 장로 부부는 어떤 생각으로 기도원에 머물고 있었는지, 가해자 김 씨는 어떤 상태였는지 등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당시 사건 정황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풀어갔다
영주권 취득후 지난 6월말 부푼 꿈 안고 미국행
봉사하며 여생 보내려던 계획 한달만에 산산조각
박 장로 부부가 김송수를 처음 본 것은 안나산 기도원에 들어온 지 몇 주가 지난 후였다.
“내 아들은 행복하지 않아요.” 30대의 아들을 데려다 놓으며 한 여성이 말했다. 고 씨의 아들들과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은 청년을 보며 고 씨는 그 여성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박 장로 부부가 지난 6월 재산을 정리해 미국에 들어왔을 때 미국에 거주하는 아들들은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미국에 온 뒤 박 장로 부부는 안나산 기도원에서 그간 해온 선교 사역을 계속 해나갈 계획이었다. 이들은 지난 20년간 식당, 청소 일로 한국교회들을 섬기는 선교사역을 해왔었다. 고 씨는 김 씨에게 라면도 끓여주고 언제든 냉장고에서 음식을 찾아 먹으라며 친절하게 대했다.
김 씨가 들어온 지 5일째였던 7월 26일. 고 씨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을 때 김 씨가 들어왔다. 여느 날과 다름이 없어 그를 경계할 이유는 없었다. 몇 시간 후 그가 다시 저녁 기도 모임에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김 씨는 가슴에 양 팔을 포개고 박 장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김 씨가 남편을 갑자기 찔렀어요. 그리고는 나도 찌르기 시작했죠.”
경찰은 박 장로(62)가 11번을 찔렸다고 후에 발표했다. 범행을 저지하려 했던 고 씨도 수차례 찔림을 당했고 깊은 상처를 입게 됐다.
버지니아 가정법원에서 입수된 자료에 의하면 김 씨는 지난 10여년간 정신 질환과 폭력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사건을 저지르고 난 후 경찰에 전화에 자수하면서 “한계에 이르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서 태어나 어릴 때 어머니와 미국에 온 김 씨는 고등학교 11학년 때 중퇴하고 GED 졸업장을 취득했다. 2006년 집 안의 가구들을 부수고 어머니를 위협했던 일 때문에 웨스턴 주립 병원에서 한 달간 치료를 받아야 했던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 5년 뒤 다시 어머니를 폭행한 혐의로 체포된 그는 결국 ‘정신 분열 경력’ 때문에 웨스턴 주립병원에 다시 들어가게 됐다. “대화에 집중할 수 없고 혼자 중얼거리고 웃는 모습이 자주 목격 된다”는 이유였다.
계속 문제를 일으키던 김 씨는 2012년 5월에는 또다른 문제로 법원으로부터 1년간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어머니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는 어머니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홈리스가 되기도 했던 김 씨는 결국 ‘치유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어머니의 판단에 따라 안나산 기도원에 맡겨지게 됐다.
김 씨가 휘두른 칼에 찔렸던 고 씨는 볼티모어 소재 트라우마센터로 긴급 이송됐고 나흘 뒤 뉴욕에서 거행되는 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퇴원해야 했다. “미국을 사랑했던 남편이 여기에 묻히게 됐네요”라고 고 씨는 말했다.
35년 전 만난 두 사람은 서울서 19마일 떨어진 수원 소재 시은소 교회(Mercy Seat Church)에서 부엌일을 하며 2,000명의 성도들을 섬겼다. 2010년 다른 교회로 옮기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버스를 몰기도 했다.
“남편은 자정이 넘어서야 잠을 자고 새벽 4시에 일어나 교회 문을 여는 일을 계속 했어요. 우리는 이런 충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 믿었죠.”
고 씨는 늘 자상했던 남편이 미국에서 온 조카를 위해 전국을 여행했던 일도 회상했다.
박 씨 부부가 미국 여행을 처음 한 것은 2011년이었다. 박 장로가 알고 있는 목사가 뉴욕에 살고 있었다. 그 때부터 박 씨는 미국에 올 때마다 퀸즈에 소재한 효신장로교회를 몇 달 씩 섬겼고 영주권 신청도 하게 됐다. 안나산 기도원이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효신교회의 문석호 목사를 통해서였다.
미국에 영주할 수 있는 비자가 나온 것은 지난 4월이었다. 4년 만이었다. 박 장로 부부는 가산을 정리했고 6월25일 마침내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다.
오른 팔에 입은 상처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고 씨는 친구가 빌려준 차를 이용해 약을 타다 먹고 있다. 돈이 없어 메릴랜드주에서 남편의 장례와 병원 비용을 대줬다. 고 씨의 조카는 숙모를 돕기 위해 모금을 하고 있는 중이다.
고 씨는 영어를 못하지만 남편의 꿈을 미국에서 계속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남편이 천국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안심이 된다”고 말하지만 남편을 따라 갔었으면 하는 생각도 한다.
“만약 그가 나도 죽였다면 행복했을텐데...”
고 씨는 아들 명기 씨가 눈물을 닦아줄 때 이렇게 말했다.
<정리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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