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의 미학자 오오다께 9단
그는 떨고 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간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보아도 아무런 수도 보이지 않는다.
상대는 일본바둑의 자존심이라고 일컫는 오오다께(大竹英雄) 9단. 500년 전통의 일본바둑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미학바둑의 원조라고 하는 오오다께 9단이다. 반상(盤上)의 미학자(美學者)라며 바둑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고 아름다움과 격조의 경지로 바둑을 끌어 올렸다고 평가받는 이다.
한국 조남철 국수와 조치훈 명인을 배출한 일본 바둑가의 명문 기다니 도장의 수석사범으로 초일류기사들의 맏형 격인 오오다께 9단과의 대국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한없이 높은 세계적인 초일류 상대 앞에서 세계대회 경험도 없고 유학경험도 없는 순수토종 된장바둑의 서봉수는 떨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늘 배가 고픈 서봉수 앞에 놓여진 40만불의 우승상금이 너무나 부담이 되었을까. 1997년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제2회 세계바둑대회 응씨배 결승 5번기 최종 대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2회 응씨배 결승 대국
제2회 응씨배 세계대회에서 한국에게 주어진 4개의 엔트리 티켓으로 저조한 승률이지만 가까스로 말석에 참가하게 된 서봉수 9단이었다.
그러나 대회에 참석한 3명의 한국선수는 모조리 떨어져 나가버렸다. 1회 대회 우승자 조훈현 9단과 유창혁 9단. 이창호 9단 등 한국의 간판 승부사들이 전멸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서봉수 9단 혼자다. 필마단기로 적진을 헤치고 천신만고 끝에 올라온 결승 5번기 2승2패의 최종 국이다. 바로 앞에는 어마어마한 상금과 바둑황제의 왕관이 놓여있다.
대만에서 열렸던 1차 예선에서 대만의 정명완 9단을 무찌르고 2차 예선에서 일본의 후지사와 9단에서 승리했으며 3차에서는 우주류의 다께미야에게도 승리하고 준결승에서는 막강 조치훈9단을 무너트리고 맞이한 결승 5번기 최종국이었던 것이다.
과연 서봉수는 세계 바둑황제의 왕관을 쓸 수 있을까.
-죽기로 작정하면 살길이 보인다
최종 대국날 점심 휴식을 위하여 잠시 대국실을 나온 서봉수의 표정은 완전 사색이었다. 눈은 허공을 바라보며 다리는 휘청거리고 있었다.
“수(手)가 보이지 않아요.” 나오자마자 기자들에게 터트린 푸념이다.
바둑이 비세임을 말해주는 듯하였다. 매끈하고 세련된 미학자 오오다께 9단에게 포석에서 밀려 불과 60여 수만에 어려운 국면에 몰리고 만 것이다.
아무런 말도 하기 싫은 듯 점심식사도 거른 채 자기 방으로 들어간 서봉수. 얼마 후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한국기원 관계자들과 기자 앞에 그는 다시 나타났다. 눈빛에서는 매서운 살기가 돋아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에서 보여준 살신성인의 마음가짐이며 난중일기의 한 귀절인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必死卽生)’의 각오다.
점심 휴식 후 속개된 대국부터 그는 미치기 시작했다. 반전무인, 싸움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무서울 것도 없다. 마구잡이로 상대의 진영으로 치고 들어가면서 난투전(亂鬪戰)이 벌어진 것이다.
죽었던 말들이 기적처럼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고 상대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적의 진영을 초토화시켰다. 말 그대로 난전호투였다. 마침내 진흙탕에서 실전으로 단련된 싸움꾼에게 미학자도 힘을 못 쓰고 무너졌다. 싸움을 위주로 한 토종 된장바둑이 미학자를 넘어트린 것이다. 그리고 40만불의 상금과 바둑황제의 명예를 움켜쥐었다.
-미학 바둑은 몰락하고 잡초가 살아남다
이로써 일본의 미학바둑은 몰락했다. 그 이후로 국제바둑대회에서 일본은 연전연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일본바둑은 실전을 위주로 한 치열한 기 싸움에서 한국에 밀려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동네깡패에게 두들겨 맞은 태권도 선수처럼 실전위주의 토종 싸움꾼에게는 약한 것이다.
서봉수(62)는 잡초바둑이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다시 일어난다. 그는 1953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났다. 1970년, 17살 고등학생으로 프로로 입단하여 그 다음해에 조남철 국수를 무너트리고 약관의 어린나이로 한국 명인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당대의 국수 김인을 무너트리고 일본 유학에서 배운 바둑이 아닌 한국토종바둑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는 한번도 선생에게나 유학으로 바둑을 배운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그저 동네기원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내기바둑을 좋아하는 부친에게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토종바둑이니 실전바둑, 잡초바둑이라고 부른다.
바둑황제 조훈현과는 동갑이며 일세를 풍미한 라이벌이라고 칭해진다. 하지만 불세출의 천재 조훈현에게 밀려 오랜 세월을 2인자의 그늘에서 보내야 했던 비운의 바둑 영웅이기도 하다.
조훈현과의 프로기전 통산 대국기록은 118승 243패로 열세이다. 명인전 우승,국수전 우승, 세계대회 응씨배 우승, 세계대회 진로배 국가대항 연승전 9연승 기록과 한국인 최초로 프로기전 1,000승을 달성하였다.
choi1581@daum.net
풍운재 최환정(Charles Choi)
미국바둑협회(AGA) 공인 7단
워싱턴바둑동호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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