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가장 큰 도시는 필라델피아 아메리카에 자리 잡은 영국 식민지의 경제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착실한 번영이다. 인구 증가가 가장 정확한 번영의 지표다. 1640년 식민지의 인구는 2만5,000명이었지만 1690년에는 20만 명, 1770년에는 약 200만 명에 달했다. 1690년과 1770년 사이에 무려 열 배나 증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식민지 경영을 간단히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이 성공이 영국의 식민지 경영정책 덕분이 아니라 그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룬 것이라고 응수하지만 이 점은 좀 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 번영은 주로 농업, 목축, 어업으로 이루어졌다. 도시가 거의 없었다가 1790년에야 겨우 다섯 개 도시에 8,000명 이상의 인구가 있었다. 가장 큰 도시는 필라델피아였고 다섯 개 도시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전체 인구의 3.3퍼센트에 불과했다. 미국인 90%가 농업 종사 미국인의 10분의 9 이상이 농사를 지었고 그 외에 상인, 선주, 선원, 광부, 장인이 있었다. 공장은 아직 몇 개밖에 없었으며 중요한 존재도 아니었다. 영국이 식민지에서의 공업 발전을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인의 관점에서 식민지란 이익을 위한 하나의 사업이고, 식민지는 본국에 다음과 같이 기여하는 대상이어야 했다.
1) 영국에 부족한 물자, 즉 포도주(프랑스에서 수입하는 품목), 향신료(포르투갈에서 수입하는 품목), 목재(스웨덴에서 수입하는 품목), 모피, 질그릇, 고래기름, 초석, 역청, 대마 등만 생산할 것. 2) 영국의 공업제품을 구입하는 시장이 될 것. 결국 원료를 완제품으로 만드는 공업은 본국의 사업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영국 선박이 수출품 독점수송 이런 사고방식은 ‘국가 번영은 수출 흑자를 늘려야 가능하다’는 중상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가급적 외국에 많이 파는 동시에 외국에서 적게 사들이는 것이 번영의 원칙이라 여긴 것이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와 기타 식민지에서는 영국이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품목만 재배하도록 허용했다. 식민지 지도자들은 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그들은 부여받은 역할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조건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식민지는 원자재 외에는 어떤 물건도 생산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부유해진 식민지인은 그 자금을 공업에 투자하지 못했다. 1651년 제정한 ‘항해법 Navigation Act ’은 영국으로 보내는 식민지의 수출품은 영국 선박이 독점 수송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1663년에 제정한 ‘주요산물법 Staple Act’은 식민지가 수입하는 외국 물자는 영국 항구를 경유해야 하며 그곳에서 우선 관세를 지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국과 영국 식민지 사이의 무역은 모든 외국과의 경쟁에서 철저히 보호받고 있었다. 영국 항구 경유해야 수출가능 1660년에 제정한 법령은 몇 종류의 산물(담배, 설탕, 목화, 염료) 수출을 영국 시장에만 한정하고 있다. 그리고 18세기 들어 이 품목에 다음과 같은 물자를 추가했다.
1706년 콜타르. 역청 등의 선박용품, 1706~1730년 쌀, 1722년 모피, 1733년 당밀, 1764년 철. 목재. 피혁 등이 그것이다. 소맥, 어류, 럼주는 이들 품목에 들어 있지 않았지만 영국의 항구를 경유하지 않고는 수출할 수 없었다. 즉, 프랑스령 및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 포르투갈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직접 거래는 금지되어 있었다. 남부 농장주 자식들의 유학 전반적으로 봤을 때 식민지가 여러 가지 제한으로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대신 식민지는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았고 영국에 대한 담배수출권을 독점했다. 1620년에 제정한 한 법령으로 영국에서는 담배 재배가 금지되었다. 중상주의의 영향은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담배, 쌀, 염료 등을 생산한 남부는 이것을 필요로 하는 본국 제품과 손쉽게 교환할 수 있었다. 남부의 농장주들은 영국에 대리점을 두고 상거래를 했다. 그들의 아들들이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로 유학을 가면 그들에게 대리점을 맡겨 수놓은 조끼, 목도리, 신간서적 등 필요한 물자를 구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독점은 농장주에게 위험한 일이었다. 제퍼슨은 농장주의 의무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인계되는 바람에 런던 상인들에게는 농장주가 일종의 세습 재산처럼 되었다고 말했다. 결국 남부는 부유해지지 못하고 간신히 명맥을 이어 나가는 정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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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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