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원한 ‘얼음 이야기’, 투명하고 단단하며 잘 녹지 않아야 ‘특급얼음’
▶ 1800년대 제빙기 탄생, 1900년대에 냉장고 발명
얇은 유리 잔을 움켜쥐자 서늘한 한기가 전류처럼 통했다. 입술에 그 가녀린 테두리가 먼저 닿았다. 시원한 액체가 입 안으로 왈칵 흘러 들어온다고 생각했을 때, 차가운 고체가 콧잔등에 부딪혔다. 얼음이었다. 얼음은마치 스텔스 모드를 켠 잠수함처럼 액체 안에 투명하게 숨어 있었다. 유리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는 요정의 노랫소리처럼 곱고 맑았다. 잔을 비울때까지도 얼음은 거의 그대로였다.
열사(熱死)의 오후, 살겠다고 움켜쥔 아이스카페라테는 플래스틱 겉면에 온통 땀을 붙이고 있었다. 우유와 커피가 뒤섞인 시원한 음료는 아껴마실수록 괴상한 맛을 냈다. 얼음이반쯤 녹은 그것은 더 이상 아이스 카페라테가 아니었다. 아이스카페라테는 얼음이 녹기 전에 콸콸 마셔야 하는 음료다. 맛을 놓고 본다면 우유가 섞이지 않은 아이스커피 역시 마찬가지다. 얼음이 녹아 물이 섞이면 원래의 맛이 흐트러진다.
전자는 몇 해 전 도쿄 긴자의 한바(bar)에서 만났던 얼음이다. 잘 녹지 않고, 단단해 치아로 깨기 힘들다.
후자는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업소용 제빙기에서 나온 뿌연 얼음이다. 그리 단단하지 않아 빙과처럼 깨물어 먹기에 차라리 좋다. 전자는 이제 서울의 바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게 되었고, 후자는 여전히 어느 업소에서나 사용하고 있다. 가정에서 쓰는 정수기나 냉장고가 만들어내는 얼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 사막에도 있었던 냉각기술
맛있는 얼음이란 무엇일까? 우선앞서의 예를 통해 보자면 질문부터가 틀렸다.‘ 맛있는 얼음’이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얼음은 물이다. 물이 빙점 이하의온도에서 고체가 되어 있는 상태에 대한 묘사이며, 온도 그 자체다. 음식에 있어 얼음은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도를 식히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다. 단지 도구다. 온도를 지닌 식기의 보조역이자, 열기구(熱器具)에반대되는 개념의 조리 도구이기도 하다. 인류가 불을 다루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얼음을 정복한 것은 상대적으로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자연이 시연하는 냉각 현상의 실마리를 열심히 봐뒀다가 똑같이 재현했을 뿐이었다. 바람이 불면땀이 마르고, 땀이 마른 피부가 시원해진다.
물이 증발할 때 열을 가져가는 현상을 이용해 고대의 냉장고가 저 멀리 사막에 존재했고, 그로 인해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암포라(진흙으로 만든 항아리) 속 시원한 와인을 매일 밤마실 수 있었다.
수분의 증발을 도울 사막의 모래바람조차 없는 밤, 왕의 노예는 겉에 물을 뿌린 암포라에 부채질을 해 바람을 만들어냈다. 수분이 바람에 증발되면서 안의 내용물이 식혀진다. 고대의 냉각 기술이다.
이후 물리와 화학이 발전을 이어온 끝에 1800년대에 이르러 제빙기가 탄생했고, 1900년대에는 현재와 원리가 별다를 바 없는 가정용 냉장고도 진작에 발명되었다. 겨울철 호수 등에서 건져 올려 그 안의 온갖 몹쓸 병까지 덤으로 얻게 했던 천연얼음 대신 깨끗한 물로 기계에서 얼린 안전한 인공 얼음이 인류와 함께하게 됐다. 얼음은 아바나의 뜨거운태양 아래서 음료를 차갑게 식혔고 범선에 실은 소고기나 과일의 온도를 얼기 직전까지로 떨어트려 안전하게 보존했다.
▶단단한 얼음이 천천히 녹는다
‘맛있는 얼음’의 형용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표현은 ‘ 맛있게 하는얼음’이라는 말이다. 간이 잘 맞은 찌개를 의심하며 물을 더 부었을 때 맛이 희한하게 변하는 경험은 누구나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물은 맛의 훼방꾼이다. 이미 맞은 간을 망가뜨린다. 모든 음식이 그렇듯, 칵테일이나 커피 같은 음료 역시 ‘간이 잘 맞은’상태여야 맛이 좋다. 얼음이 녹아버린 칵테일, 아이스카페라테에서는 기껏 맞은 간이 망가진다. 얼음은 음료를 식히되, 자신이 녹지는 않아야 한다. 정확히는 최대한 천천히 녹아야한다.
쉽게 녹지 않기 위해서는 얼음이 잘 얼려져야 한다. 가정용 냉장고의 얼음은 금세 녹는다. 업소용 제빙기도 가장 좋은 것을 사면 녹는 속도를 늦출 수 있지만 대개는 금세 녹는 얼음이 나온다. 맛있게 하는 얼음은 얼리는 온도에서부터 시작된다.
투명한 얼음은 한 번 끓여 물에 녹아 있는 기체를 날려낸 물로 얼렸을때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투명하다고 해서 다 맛있는 얼음인 것이 아니다. 관건은 얼리는 온도 단 하나다. 물은 수소 둘, 산소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수소와 산소는 서로 반대의 전하를 띈다. 그래서 물은 접착성이 높다. 얼음끼리 쉽게 달라붙는 것을 기억해 보면 될 것이다.
낮은 온도에서 급속냉동하면 분자는 자유분방하던 실온에서의 형태대로 고정된다. 불안정하다. 금방 녹는다. 높은 온도에서 얼리면 얼음을 얻기까지 시간은 더 걸리지만 얼음의분자가 안정적으로 붙어 있다. 더 천천히 녹는다. 기억해 보자. 편의점 등에서 사온 얼음은 집에서 얼린 것보다 천천히 녹는다. 그리고 얼음 자체도 훨씬 단단하다. 얼음 공장에서 품질 좋은 얼음을 얻기 위해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서 오래 얼렸기 때문이다. 영하 15도 정도에서 얼린다. 이틀이 걸린다.
얼음 가운데 형성되는 흰 심은 물속에 녹아 있는 H₂O 이외의 것들이다. 우리가 마시는 생수는 완벽한 H₂O가 아니다. 달콤한 약수물 역시 마찬가지다. 공기 중의 각종 기체, 미네랄 등이 녹아 있다. 얼음이 어는 동안 이것들이 H₂O끼리의 결합에서 밀려나 가운데로 몰린다. 이 부분의 얼음은 잘 녹고, 맛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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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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