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바람이 불고 가을로 들어서면 서둘러 하는 일 중 하나가 집 안팎으로 가을 단장을 하는 것이다. 장식용 호박들을 현관문 앞에 놓고 아름드리 색색의 국화꽃들을 집 앞과 안에 들여놓는다. 가을 집 단장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이닝룸 테이블보를 가을 색으로 바꾸는 일인데, 올해는 매년 쓰던 테이블보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작년 가을에 둘째 아이가 매니큐어를 지울 때 쓰는 액체를 쏟아 그 테이블보의 상당 부분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몇 번을 빨아도 복구가 안 되고, 정든 물건을 버리자니 아쉽고 해서 손상된 부분을 잘라내고 남은 부분을 잘라 다른 천들과 어울려 퀼트테이블보를 만들기로 했다. 처음 미국에 와서 정착한 텍사스에서, 한 미국교회의 외국인을 위한 문화교실에서 퀼트를 처음 접했다. 당시 함께 수업을 듣던 일본 친구들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크리스마스 퀼트를 만들고 있어 그들과 함께 나도 크리스마스트리 퀼트를 만들었었다. 첫 퀼트를 하며 얼마나 시간과 노고가 많이 드는 일인지 경험한 후 그 후론 엄두를 내지 않았다.
큰아이가 대학으로 떠나간 후의 허전함도 달랠 겸, 나는 재봉틀과 천들을 꺼내어 재단하고 바느질을 시작했다. 예전에 퀼트용 조각천을 사서 크리스마스 퀼트를 만들 땐 생각지 못했는데, 못쓰게 된 테이블보와 쓰다남아 조각난 천들을 모아 테이블보를 만들며 한국의 보자기 생각이 났다. 한국의 보자기나 서양의 퀼트나 조그만 조각이라도 버리지 않고 그 조각들을 이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색색의 조각을 조합해 예술로 승화시켰으니, 옛사람들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생각이 보자기에 이르니, 아주 어릴 적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눈에 들어왔던 보자기가 덥인 자그마한 밥상이 떠오른다. 한옥에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마루가 있었는데, 날이 따뜻할 때는 잠에서 깨어보면 열린 미닫이 방문 사이로 마루 한 가운데 놓인 보자기가 덥인 밥상이 눈에 들어왔다. 분홍, 연노랑, 하늘색 등의 투명하리만치 얇고 은은한 색의 보자기. 추운 날에는 방문은 닫혀있고 온돌방 한 구석, 불이 잘 들지 않는 곳에 밥상이 놓여 있었다. 보자기를 들추어 밥상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불이 잘 드는 따뜻한 아랫목 요 아래 숨겨져 있던 뚜껑이 덮인 밥그릇을 볼 때마다 무슨 보물을 찾은 것처럼 얼마나 흐뭇했었는지!
돌이켜보면, 집안 이곳저곳에서 항상 바쁘시던 엄마가 막내인 내가 낮잠이 들면 깨어났을 때 엄마가 곁에 보이지 않아도 밥상의 풍경이 내게 평온함을 주리라 생각하셨던 듯 싶다. 옛 어머니들의 그러한 지혜는 어디서 왔을까 삶의 지혜는 사랑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을까 싶다. 옛 어머니는 자신의 생 전부를 바쳐서 자식을 사랑하고 키워내셨으니…. 엄마에게서 받은 사랑을 돌이켜볼 때마다, 아이들을 키우며 일과 자아추구로 끊임없이 쫓기듯 살아온 나는 이생에서 엄마에게서 말로 받고 내 자식들에겐 되로 준듯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세상은 사랑의 보따리로, 사람이 나서 어려서는 사랑을 받고 자라서는 사랑을 주어 그 보따리가 항상 채워지는 것이라면, 이 세상의 보따리를 축내지 않기 위해 나는 남은 내 생의 시간 동안 열심히 사랑을 나눠주며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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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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