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자 시애틀타임스의 1면(로컬 판) 톱기사는 평소와 너무 달랐다. 홈리스 비상사태, 집값 상승, 재산세 폭등, 교통체증 악화, 경찰관 연루 총격살인 따위의 식상한 뉴스가 아니었다. 시애틀타임스에서 36년 간 근속하고 은퇴하는 칼럼니스트 제리 라지의 고별 칼럼이 4단 머리기사로 장식됐다. 손을 흔들며 편집국을 떠나는 라지의 사진도 곁들여졌다.
라지는 약 한달 전 일본계 커뮤니티의 역사보존 캠페인에 관한 칼럼을 썼다. 제2차 대전 당시의 강제수용 세대가 모두 세상을 뜨기 전에 후세들이 ‘수용소 물건 50개와 50건의 이야기’를 모아 웹사이트에 차례로 올리고 있다는 내용이다.
요즘 워싱턴주 한인 이민사 편찬위원회가 초기 이민자들의 기록, 사진, 물품 등을 수집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라지의 칼럼을 즐겨 읽었다. 빈민가정 출신 흑인인 그는, 그래서인지 소수민족 커뮤니티와 홈리스 등 극빈층의 애환에 관한 칼럼을 많이 썼다. 인종차별을 비롯해 성적, 종교적 편견과 사회적 불평등, 경찰의 과잉 폭력사용, 느슨한 총기규제 등이 그가 즐겨 다룬 주제였다. 그래서 보수적(백인) 독자들로부터 비판과 욕설은 물론 위협도 받았다고 했다.
뉴멕시코주 시골에서 홀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생 때 동네 신문사에서 청소부로 일하면서 글쟁이가 될 결심을 굳혔다. 뉴멕시코 주립대학 시절 대학신문사에서 실무를 익힌 후 동네신문사와 엘파소 타임스를 거쳐 1981년 시애틀타임스로 옮겼고, 1993년부터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자고로 사설은 신문의 꽃이라고 했다. 하지만 요즘 신문엔 사설 꽃보다 칼럼 꽃이 더 무성하다. 사설, 칼럼에 독자투고도 곁들인 ‘오피니언 페이지’ 꽃밭을 신문마다 정성들여 치장한다. 뉴욕타임스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와 토머스 프리드먼, 워싱턴포스트의 마이클 스틸 같은 명 칼럼니스트들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도 독자층이 두텁다. LA 본사와 전국 각 지사의 경륜 있는 칼럼니스트들이 쓰는 다양한 글을 매일 2폐이지 게재한다. 외부 프리랜서 칼럼니스트들의 전문분야 칼럼들도 정보의 보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칼럼엔 특유의 묘미가 있다. 보도기사보다 깊이 있고 사설보다 덜 딱딱하다. 분위기가 유화적이어서 독자들이 쉽게 접근한다. 칼럼에 녹아 있는 필자의 풍부한 경륜과 지식으로부터 독자들이 뭔가 깨닫게 된다.
적재적소의 비유나 정곡을 찌르는 비판에 독자들이 무릎을 치며 동감한다. 칼럼니스트 각자의 개성 있는 문체에 따라 고정 독자그룹이 형성된다.
라지도 두터운 고정 독자층의 성원이 없었더라면 4반세기 동안 칼럼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6일 은퇴한 그가 기왕이면 10여일 기다렸다가 ‘칼럼니스트의 날’(4월18일)에 은퇴했더라면 더 의미 있었을 것 같다. 한창 글을 더 쓸 수 있는 나이인 64세에 은퇴한 것도 아쉽다.
예전 한국 신문엔 기명칼럼이 없었다. 새내기 기자시절 한국일보 1면 맨 아래의 단칸 칼럼 ‘지평선’을 읽을 때마다 감탄했지만 필자들이 홍승면, 천관우, 유광열 씨 등 당대의 명문장가들임을 몰랐다. 미국의 신문 칼럼니스트협회(NSNC)는 1977년 창설됐고, 칼럼니스트 날 제정의 단초가 된 어니 파일은 까마득한 1945년 전사한 종군 칼럼니스트였다.
라지는 1면 톱기사로 은퇴칼럼을 썼을 뿐 아니라 시애틀 시의회와 킹 카운티의회의 초청을 받아 각각 고별연설을 했다. 한국이나 한인사회에선 볼 수 없는 부러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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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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