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이제는 먼 옛날 일이 되었지만, 7.4 공동성명이라는 것이 있었다.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북한에서도 사회주의 헌법이라는 것이 새로 채택되던 해였으니 1972년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극히 위험한 남북관계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합의한 성명이었다.
외세의 간섭 없는 자주적 통일, 무력이 아닌 평화적 통일, 사상이나 제도를 뛰어 넘는 단일 민족의 대단결 등이 그 핵심이었다. 온 나라가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당장 통일이 되는 듯 눈물을 흘리던 그 날은 그렇게 가고 말았다.
벌써 46년 전 일이다. 그런 날들이 그 후에도 몇 번인지 되풀이 되었다. 6.15 남북 공동선언, 10.4 남북 공동선언, 그리고 지난 4월 27일 판문점 선언으로 줄줄이 이어지고 그 때 마다 온 나라가 흥분으로 밤잠을 못 이루던 꿈같던 날들은 앞으로도 얼마나 되풀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김정은이 남쪽으로 걸어내려 오던 날, 그의 모습에는 형을 독살한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고모부를 잔혹하게 학살하던 살인자의 악취는 어디에 감췄는지 만면 웃음이요 비대한 몸에 팔자걸음이 참 잘 어울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지각적 착각(Cognitive illusion)’이라는 철학 용어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내 교수실 앞을 지나는 동료 교수들마다 축하한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축하… 할 일이겠지. 나와 대학원을 같이 다닌 정치학 교수가 늦은 시간에 찾아왔다. 남북이 서로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기는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단체나 나라의 한 정권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행동의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이 급격하게 변하면 그 정권은 곧 무너져 버리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요 독재정권의 경우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고 했다. 소위 ‘종북파’로 알려진 남한의 좌익인사를 제외하면 김정은이 자기의 정권을 희생하면서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많은 성명과 선언들은 그것을 만들어낸 속성파 대통령 개인들의 조급함의 소산이었다. 자신의 임기 중에 무엇인가 이루겠다는 욕심의 열매들이었다. 돈으로 북한의 체제를 변화 시키고 통일에 다가갈 수 있다는 자기 속임수의 결실은 바로 노벨 평화상과 핵무기 생산으로 이어졌다.
군에서는 북한은 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민주, 자유, 인권을 입에 달고 살면서 북한의 민주, 자유, 인권 탄압을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도 단체도 정부의 기관도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라고 한다.
이들의 뜻대로 통일이 된다면 이들은 지금 북한인민을 탄압하는 자들보다 더 잔혹한 탄압자들이 될 수도 있다. 인민의 해방과 자유를 외치던 러시아 혁명 전위 (Vanguards)들의 경우나 프랑스 혁명의 자꼬방 (Jacobin) 무리들이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이름으로 저지른 탄압과 학살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 레닌도 러시아 혁명을 수행하면서 같은 질문을 했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What Is To Be Done)? 우리의 대답은 모두가 다 아는 상식 안에 있다: 서두르지 마라. 돈 보따리 싸들고 평양 오가지 마라. 군사 경제 교육을 길게 보고 철저하게 준비하라. 통일 기금을 다시 적립하라.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교훈이 두 쪽으로 깨어진 한반도에도 적용되는 교훈임을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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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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