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가 지난해 8월 기존 화폐인 ‘볼리바르 푸에르테’의 단위를 10만 대 1로 낮춘 새로운 화폐 ‘볼리바르 소베라노’를 도입했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바탕으로 한때 중남미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지만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버금가는 물가상승으로 경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자 화폐단위에서 0을 무려 다섯 개나 지우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을 단행한 것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단위를 변경하는 것이다. 화폐단위를 보통 100 대 1 또는 1,000 대 1 등으로 조정한다. 화폐 거래의 편의성과 회계 기장의 간편화, 통화 위상 제고, 지하자금 양성화 등의 장점이 있는 반면 국민들의 심리적인 저항, 화폐 제작비용, 유동자금의 부동산 쏠림 현상 등 부작용 때문에 찬반 논란이 여전히 뜨겁다.
한국은 정부수립 이후 두 차례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2월과 박정희 군사정부 시절인 1962년 6월이다. 1차에는 100원이 1환, 2차에는 10환이 1원이 됐다.
두 차례 모두 군사작전 하듯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국민적 공감대가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충격도 컸고 경제효과는 반감됐다.
민주화 정부가 시작된 1990년대 이후로도 정부가 바뀔 때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2010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2004년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했던 사실을 공개했다. 박근혜 정부도 공식적으로는 부인했지만 지하경제 양성화와 내수부양 등을 위해 극비리에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25일 국회재정위원회 답변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논의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그동안 리디노미네이션을 둘러싼 논란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그는 “장점 못지않게 단점이 많아 조심스럽게 할 필요가 있다”며 “논의 주체는 정치권이 돼야 한다”고 한발 물러섰다.
커피 전문점이나 음식점에서는 이미 메뉴판 가격 표시에서 뒤의 0 세 자리를 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네 자릿수 화폐단위를 가진 국가는 한국뿐이라고 한다.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은 이미 정부도 인정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여전히 찬반 의견이 엇갈린다. 누가 언제 칼을 뽑을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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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곤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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