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雨)를 무릅쓰고(冒) 부추(韭)를 베다(剪)’라는 뜻의 冒雨剪韭(모우전구)는 친구를 대접하려는 진솔한 마음을 일컫는 말이다.
5세기 송(宋)나라 범엽(范曄)이 쓴 후한서(後漢書)에 곽태(郭泰)라는 학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의 친구 범규(氾逵)가 밤에 찾아오자 곽태가 비를 무릅쓰고 부추를 베어다가 (郭冒雨剪韭/곽모우전구) 전을 만들어 정성껏 대접했다(作湯餠以款之/작탕병이관지)’라는 구절에서 이 말이 유래하였다.

밤에 갑자기 그를 찾아온 친구를 반갑게 맞이하고 친구를 위해 비를 무릅쓰고 밭에 나가 부추를 베어온 곽태의 소박한 우정, 비 오는 밤에 찾아온 남편의 친구에게 정성껏 전을 부치고 술상을 차려 대접한 부인의 모습은 요즘 세태에 보기 힘든 정겨운 모습이다.
학문과 덕이 높아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던 곽태는 정치에 나서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당시 외척과 환관의 전횡(專橫)으로 어지러운 세상임에도 큰 화(禍)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서예의 대가(大家)로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4세기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 역시 당시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관직을 버리고 향리에 살며 친구들을 불러 시연(詩宴)과 주연(酒宴)을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그의 부인이 친정에 갔다가 남동생들에게 ‘왕가(王家) 사람들은 친구들이 오면 광주리와 궤짝에 있던 음식을 모두 꺼내(傾筐倒匧/경광도협) 대접하지만 처남인 너희들이 오면 평상시처럼 대접하니 다음부터 번거롭게 왕씨 집에 드나들지 말아라’고 말한데서 귀한 사람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다 내놓아 환대한다는 뜻으로 경광도협(傾筐倒匧)이란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친구들을 불러다 시를 쓰고 술 마시며 노는 걸 끔찍이 좋아했던 왕희지의 모습과 그런 남편에 대한 부인의 무언가 서운해 하는 속마음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또한 ‘머리털을 잘라 술과 바꾼다’라는 뜻의 절발역주(截髮易酒)라는 말이 있다. 동진(東晉) 시대에 도간(陶侃, 도연명(陶淵明)의 증조부)은 홀어머니 담씨(湛氏)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친구인 범규(范逵, 앞의 이야기에서 곽태를 찾아갔던 사람-늘 친구를 갑자기 찾아감)가 집에 찾아왔는데 하도 가난하여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도간의 어머니는 친구 앞에서 아들이 체면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털을 잘라 팔아 술과 안주를 사와서 아들의 친구를 대접했다. 도간 어머니의 이런 정성에 감복한 범규는 훗날 도간을 조정에 추천하여 출세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도간은 40년간 장상(將相)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어머니 담씨는 훌륭한 어머니로 칭송받았으며 어떤 이는 절발역주(截髮易酒)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술(酒)보다 고귀한 명주(名酒)라고도 말했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과 정성이 모두 녹아있는 술이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철없던 중학생 시절, 친구와 재미있게 놀다가 그가 자기 집에 가자 하였다. 마침 밥 먹을 시간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친구의 집에 따라 갔는데 그의 어머니가 싫어하지 않으시고 반가이 맞아주시며 근처 장에 일부러 나가 반찬거리를 사 오셔서 둘이 같이 먹을 수 있게 푸짐한 밥상을 차려 주시고 많이 먹으라고 하신 적이 있다. 지금 나이가 들어 생각하니 얼마나 고맙고 자애로우신 친구 어머니이셨는지 도간의 어머니 담씨가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최규용 / 메릴랜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