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초반, 천직이라 여겼던 언론계를 떠나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법인장을 맡은 적이 있다. 연 매출 1억 달러가 넘는 제법 큰 회사였고, 본사에 보고할 재무제표를 CPA(공인회계사)와 함께 정리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중 가장 자주 접한 것은 ‘대차대조표’였다. 왼쪽에는 자산, 오른쪽에는 자본과 부채가 나란히 놓인다. 기업이 가진 자산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이 표는 회계의 기본이자 재무의 핵심이다.
처음 이 구조를 접했을 땐 조금 당황스러웠다. 자산은 기업이 소유한 것이고, 자본은 스스로 축적한 몫이니 이해가 됐다. 하지만 부채 역시 자산의 한 축이라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때 회계사가 이렇게 설명했다.
“회사의 자산은 자본뿐 아니라, 남에게서 빌린 부채까지 포함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은행 자금을 잘 활용한 기업이 성공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짧은 말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말은 인생의 은유처럼 다가왔다. 지금 우리가 이룬 모든 ‘자산’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물론 우리 자신의 노력과 능력, 선택이라는 ‘자본’이 큰 몫을 차지했겠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부채’, 곧 타인의 도움과 배려, 빚진 마음이 스며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삶의 굴곡 속에서도 변함없이 응원해준 가족, 실수를 감싸준 선후배, 기회를 준 조직, 낯선 상황에서 마주친 작은 친절, 절망의 순간에 건네진 친구의 위로… 그 모든 작고도 결정적인 순간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낸 원천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야의 왼쪽에 놓인 자산, 즉 얼마나 성취했는지, 무엇을 가졌는지, 어디에 도달했는지를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 그러나 인생의 대차대조표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자본과 부채까지 함께 들여다볼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우리가 ‘내 것’이라 여기는 것들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사실은 누군가에게서 빌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회계에서 부채는 언젠가 갚아야 할 의무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도움을 준 이에게 직접 갚지 못한다면, 다른 이에게 베푸는 것으로도 훌륭한 ‘상환’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빚을 갚아가는 것이다.
그 빚을 조용히, 그러나 평생을 걸쳐 묵묵히 갚아낸 이가 있다. 바로 2022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주인공, 김장하 선생이다. 그는 경남 사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평생 한약방을 운영하며 번 돈을 60년 넘게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언론 인터뷰 한 번 없이, 이름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았다. 그는 자신이 받은 도움을 ‘사회에 대한 빚’으로 여기고 조용히 갚아나갔다.
최근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이 인용된 후,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의 일화와 함께 그의 삶이 다시 조명받았다. 김장하 선생의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한 문 재판관은, 사법시험 합격 후 그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그때 김장하 선생은 말했다.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줬을 뿐이니,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거라.”
그것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 대차대조표 속 ‘부채’를 공동체에 갚아나간 한 어른의 방식이었다. 어떤 제자가 “제가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라고 하자, 김장하 선생은 이렇게 어깨를 다독였다고 한다.
“내가 그런 걸 바란 거는 아니었어.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언론계로 돌아온 지금, 어느덧 60대 중반이 되었다. 물리적인 나이만 따지면 어른이지만, 진짜 어른이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앞으론 내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내 마음 속 ‘빚’을 어떻게 상환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겠다. 나는 언제쯤 내가 받은 것 이상을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참 어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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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희 부국장대우ㆍ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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