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는 방문할 때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한 편의 시와 같다. 어느덧 네 번째 방문이 되었지만, 이 도시는 나를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맞이하며 내 영혼을 홀린다. ‘남미의 파리’라는 찬사에 걸맞게 우아하면서도 도발적이며,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매력을 동시에 지닌 곳이다.
탑여행사와 함께한 이번 여행에서 절실히 다시 깨달은 것은 ‘가성비’만 고려한다면 그 어떤 미국 여행사도 한인 여행사를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맛집에서의 삼시 세끼 식사, 고품격 호텔, 안락한 버스와 풍부한 경험의 로컬 가이드, 그리고 모든 입장료가 포함되어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러나 단점도 있었다. 2주 여행에 10번에 걸쳐 비행기를 탑승하고 매일 바뀌는 호텔 투숙 등,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행군하는 고초를 감내해야 했다. 사서 하는 고생 같아도 막상 미국여행사와 여행하면 그들의 여유로움은 답답함으로 다가와 한인 정서와는 잘 맞지 않는다. 가성비는 너무 차이가 나서 한인 여행사에서 두 번 할 것을 미국 여행사에서는 한 번 밖에 못한다. 소위 말하는 ‘재미’ 역시 완전 다르다. 그들도 유머와 감성이 풍부하지만, 나눔과 소통의 문화에서는 차이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얼굴과 옷자락에 묻은 과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내게 정열적이고 방랑자 같은 젊은 집시 여인 카르멘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노련한 카페 주인처럼 편안하게 다가서기도 한다. 어느 순간엔 고대 그리스 캐리아티드 석상처럼 물동이를 머리에 인 채 고요히 서 있어, 삶의 고초와 우아함으로 나를 매혹하기도 한다. 내가 목격한 지난 30여 년의 격동적인 변화는 그녀의 얼굴과 옷자락에 고스란히 남아 나에게 전해준다.
처음 그녀와의 만남은 첫 데이트와 같이 설렘과 아쉬움을 각인 시켜주었다. 거리는 생동감으로 넘쳤고, 성형수술의 메카답게 세계에서 가장 멋진 선남선녀와 패셔니스타들을 집결시켜 놓은 듯했다.
코와 모발은 이스탄불, 몸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긴 줄이 서 있어 궁금해 안을 들여다보니 성형의사 사무실이었다. 놀랍게도 조지워싱턴대 의대 졸업장이 떡하니 걸려있었고, 모든 의약품은 미제, 의사는 아르헨티나인, 의사소통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당시 보톡스 시술 가격은 미국의 10분의 1이었다. 젊은 의사와 DC에 관한 덕담을 주고받다가 헐! 얼떨결에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 보톡스 경험을 했다. 의사는 이곳에서는 코 수술과 엉덩이 확대 시술이 가장 많다고 했다. 이탈리아계의 큰 코를 줄이는 수술과, 놀랍게도 엉덩이 확대 성형수술이 유행이었다. 남친과 같이 거리를 활보하다 남친의 눈길이 다른 여성들의 풍만한 히프로 향하면 느끼는 좌절감이 이 시에서는 더욱 심하다고 설명했다.
‘뽕’이냐 수술이냐, 그것이 문제이다
간단히 ‘뽕’을 사용하는 한인여성들에 비해 금전손실과 위험부담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 성형의 메카라고 하지만, 미국인들은 성형수술을 위해 이스탄불을 많이 찾는다. 터키인들은 매부리코가 많아 코수술로 유명하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2년 전 찾았던 이곳은 극심한 정치·경제 불황으로 관광지에도 노숙자가 도로변에 침구를 깔고 생활하고 있었고, 치안과 시민들의 자존심은 하수구에 버려진 듯했다. 최고 상권인 플로리다 거리에서는 남녀노소 “캄비오 달라레스(달러 환전)”를 외쳤고, 정장 차림의 은행원이 암거래 환전을 하는 모습에 나라가 완전히 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 교황이 주교로 집전했던 성당 정문에는 “종교는 독재”라는 문구를 비롯하여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거친 낙서들이 가득했다. 슬픔이란 이런 것인가? 폭력과 절망을 목격했고, 새벽 안개 속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한 젊은이의 등골뼈가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공룡의 뼈처럼 처참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고, 에비타의 “나를 위해 울지 마라”라는 절절함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었다.
천당보다 들어가기 힘든 공동묘지
이번 관광에서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절실한 노력이 엿보였다. 세수는 안 해도 립스틱은 칠하라고 하지 않던가. 리콜레타 묘지가 그런 곳이며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의 이야기와 이 도시가 전하는 희미한 추억과 짙은 향수를 가슴 깊이 간직한곳이다. 이 묘지는 부유촌에 자리잡고 있으며 장엄한 그리스 도릭 기둥 위편에 라틴어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Expectamus Dominum)” 라 쓰여 있다. 이곳은 ‘천당보다 들어가기 힘든 묘지’로 불린다. 영묘 하나하나 예술품이며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고위인들과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특히 에바 페론의 묘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다. 그녀는 빈민층을 위한 사회복지 정책과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으로 사랑받았으며, 그녀의 남편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 정치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지도자 중 하나로서 포퓰리즘 정치의 상징이다. 이들의 삶과 죽음은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골목길에 소박하게 마련된 묘지-한줄기 햇살 같은 삶
그러나 페론 대통령은 이곳에 안장 되어있지 않고 시 외곽 그의 가족묘에 있다 그는 세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현재까지 어느 부인도 그의 곁을 지켜주지 않고 있어서 우리 남성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그의 첫 부인은 부르주아 출신으로 가정적인 성격이며 페론의 ‘첫사랑’이었다. 반면 에바는 빈농의 사생아 출신으로 사창가에서 삶을 유지했으며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을 지닌 카리스마의 화신이었다. 금발의 웨이브 머리, 서구적 이목구비로 ‘ 정치무대위의 여신’ 칭호를 받았다. 그는 첫 부인과 같이 자궁암으로 청춘의 나이인 33세에 눈을 감았다. 사후, 뮤지컬과 영화로 불멸의 아이콘이 된다.
그런데 왜 그 유명한 에바는 페론 대통령과 함께 안장 되어있지 않은 것일까? 그 이유는 페론이 또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세번째 부인이자 페론의 사후 세계 최초의 여성대통령에 취임한 이사벨 페론이 아직 당당히 94세의 나이에 생존해 있기 때문이며 그녀는 페론 유산의 마지막 불꽃으로 평가받고있다.
첫 부인보다 마지막 부인이 중요한 이유
유명세와 달리 에바는 후미진 골목에 그것도 친정 두마르테 가문 묘지에 소박하게 자리 잡고있다. 그녀의 동판 앞에 서면 세상만사, 부귀영화 모두 덧없음이 절실히 느껴진다. 그녀의 시신은 사망 후 군부에 의해 손상되고, 격동의 시기에 이탈리아, 스페인을 전전하다 1976년에야 이곳에 안치되었다.
묘지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성지와 같이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막상 그 앞에 서면 너무 소박하여 허무함이 느껴졌다. 마침 현지 젊은 여대생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불멸의 국모라며 에비타에 관하여 열정을 표했지만 묘석위에 굴절되어 달아나는 한줄기 햇빛과도 같았던 삶, 허무했고 여학생의 목소리 역시 공허히 좁은 골목길안에서 맴돌았다.
탱고는 학들의 공중체조
탱고는 19세기 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 지역에서 시작된 춤으로, 초기에는 하층민들의 춤이었으나 곧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탱고의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동작과 음악은 도시의 영혼과 일맥상통하며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다. 우리가 관람한 식사와 와인을 곁들인 디너공연은 무희들이 부상하며 날아다니는 학같아 어안이 벙벙했다. 공연을 보며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깊고 강렬할 수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잊지 못할 여행
여전히 마라도나와 메시의 신화가 깃든 보카 주니어스 축구장 앞에 서서 축구라는 스포츠가 어떻게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도시의 열정을 불태우는지를 체감했다. 도시 곳곳의 카페들은 파리의 정취를 닮아 나를 매혹하며, 그녀는 그 모든 영욕의 뒤안길에서 나에게 조용한 속삭임을 전한다. 희미한 추억과 짙은 향수가 어우러진, 영원히 잊히지 않을 여행이길 기원한다며.
<제프 안, AKI 연구원 원장·Jahn20@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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