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펼치면, 때때로 몇 줄의 문장과 지나치게 넓은 여백만 남아 있는 페이지와 마주하게 된다. 읽기보다 해석을 요구하는 침묵 앞에서 독자는 문득 발을 헛딛는다. 제목과 몇 줄의 문장만 놓인 채, 문장부호는 사라지고, 행은 잘게 부서져 있다, 한때는 실험이라 불리던 이러한 방식이 어느 순간부터 관성처럼 반복되고, 그 관성은 마치 시적 감각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얻은 듯하다.
여백은 본래 언어가 다 담아내지 못한 울림을 머금기 위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요즘의 일부 시에서는 그 여백은 왜 비어야 하는지, 왜 끊어야 하는지 왜 모호해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문장부호를 지운 채 침묵만 남긴 문장들 앞에서 독자는 의도를 추측하다 지쳐버린다. 난해함은 전략이 될 수 있지만, 불친절함은 미덕이 아니다.
물론 시에는 압축도 필요하고 침묵도 필요하다. 여백 시를 깊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다. 그러나 그 여백이 의미를 밝히기보다 빈약한 내용을 감추는 장식이 되는 순간, 시는 스스로 언어의 책임을 저버린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시에는 난해함보다는 언어의 정확성이 더 절실해진 듯하다. 오래 남는 것은 과장된 형식이 아니라, 끝내 살아남는 한 문장의 진실함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더 깊은 시로 착각해 온 것은 아닐까. 그러나 시의 힘은 모호함 자체가 오지 않는다. 정확한 언어와 치열한 사유, 그리고 사유가 남기는 미세한 떨림에서 나온다. 말을 아끼더라도 말해야 할 것은 분명해야 하고, 여백을 두더라도 그 여백이 의미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 짧은 문장 안에서도 감정과 생각은 충분히 선명해질 수 있다.
문장부호는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사고의 호흡을 드러내는 장치이며, 행과 연은 의미의 리듬을 만드는 최소한의 약속이다. 그러나 최근의 시들은 설득력 있는 이유 없이 이러한 장치들을 덜어내어, 독자가 시를 품고 안으로 들어설 단서마저 지워버린다. 설명되지 않는 문장과 지나치게 비워진 페이지가 ‘세련된 감각’으로 소비되기도 하지만, 독자가 끝내 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 난해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시는 감상보다 해석을 먼저 요구하는 침묵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그러나 시는 혼자 완성되는 언어가 아니라, 읽는 사람 안에서 비로소 살아난다. 독자는 해석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 시를 읽지 않는다. 한 문장이 건네는 위로와 통찰, 혹은 오래 남는 울림을 만나기 위해 읽는다. 모호함을 깊이로 착각하는 순간, 시는 독자와의 연결고리를 잃고, 이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가 가진 윤리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문학은 결국 독자와 만나기 위해 존재한다.
물론 오늘에도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건네는 시들은 여전히 있다. 다만 최근의 일부 경향 속에서 시의 언어가 지나치게 독자와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결국 시가 독자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어떤 실험도 의미를 잃는다.
이제 한국 현대시는 형식의 관습을 넘어 다시 언어의 본질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독자를 시험하는 시가 아니라 독자와 함께 세계를 바라보는 시, 여백의 크기가 아니라 의미의 밀도로 깊어지는 시. 그리하여 단 한 줄만으로도 오래 마음에 남는 언어. 시는 난해해서 깊은 것이 아니라, 끝내 마음에 오래 남기 때문에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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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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