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짙어가는 6월이다. 이맘때가 되면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올해로 6.25 75주년을 맞는다. 필자는 2년 전에 한국전쟁 기념관에서 열린 6.25 73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주일 예배 끝나고 늦게 도착해서인지 행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풍경을 마주했다. 행사 프로그램 표지는 무명 병사의 철모 사진이었다. 표지 위에 “You are not forgotten.”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짧은 문장이 필자의 마음과 시선을 압도했다. 사진 속 철모는 군데군데 찢어지고 퇴색되어 그날의 참혹했던 상황을 말해주었다.
행사장 한쪽에 전시된 흑백사진들은 그날의 생생한 모습과 전쟁의 상흔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다른 한쪽에는 6.25를 기념하는 학생들의 사생대회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용사들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을까. 작품들을 보며 그 날을 상상해 보았다.
참전용사들은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 남편, 형제, 연인, 그리고 벗이었으리라. 무거운 군장을 메고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스러져 갔을 어린 병사들의 절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빗발치는 포탄과 총탄 속에서 미처 챙기지 못하고 벗겨진 무명 병사의 군화에 피어나는 들꽃을 상상하며 전장에서의 긴박했던 상황들을 가늠해 보았다. 총알이 뚫고 간 철모의 주인은 누구일까 상상하면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전장에서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갔을 어린 병사들의 모습, 그 순간 떠올랐을 가족들의 얼굴, 전사 소식을 접했을 가족들의 충격과 슬픔, 이 모든 장면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몇 년 전에 길을 가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이정표를 만났다. 캘리포니아주 고속도로 126번의 일부 구간은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Highway’로 명명되어 있으며 이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상징적인 도로이다. 이 도로는 벤추라에서 시작해 필모어와 산타 클라리타를 지나 인터스테이트 5번(I-5)까지 이어진다. 어느 지점을 지나 한국전쟁박물관 이정표가 보였다. 박물관을 찾았지만 팬데믹으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건조한 바람이 쓸쓸하게 도로 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기념행사는 조촐하게 치러진 듯했다. 기념관 장소가 협소해서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어려워 보였다. 행사를 주관하는 관계자들과 후원단체들, 유공자 가족들만 참여하는 행사인 듯해 아쉬움이 남았다. 전쟁에 참전해 별이 된 참전용사들의 이름이 기념관 돌판에 새겨져 있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그들의 고귀한 희생 위에 세워졌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오롯이 희생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You are not forgotten.” 이 문구가 잠든 병사들의 넋과 함께 짙어가는 6월의 녹음 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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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실 시인ㆍ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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