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였지만 기억이 생생한데 어른들의 불안한 모습에 뭔가 심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부지런히 큰 백팩에 짐을 싸고 있었으며 멀리서 총소리도 들려와 불안한 분위기는 고조에 달했다. 그 전날 깊은 밤에 누군가 세게 대문을 두드려 큰오빠께서 조용히 문을 열어보니 큰오빠의 제자중 한 학생이 가쁜 숨을 내쉬며 긴장된 어조로 “선생님 빨리 피하십시오, 좌익 학생들이 선생님을 잡아 인민재판에 회부한다는 비밀 정보를 들었습니다.”
큰오빠는 그 시절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일하시다가 잠시 전주로 내려와 한 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로 교편 생활을 하고 계실 때였다. 그래서 큰오빠는 급히 짐을 싸셔서 그날 밤에 어딘가로 피신하셨다.
셋째 오빠는 1947년, 신의주 동중4학년을 다니다가 공산주의에 허무감을 느껴 피난민 대열에 끼어 용감하게도 단신 월남하여 큰오빠가 계시던 전주로 내려와 신흥고등학교에 재학중이셨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 학교의 분위기는 좌익과 우익계 학생들이 대거 충돌을 일으켜 너무나도 살벌한 분위기를 체험한 작은 오빠는 남하한 자신의 생명위협을 느껴 국군에 학도병으로 자원 입대하셨다.
전선으로 떠나기 전 분배 받은 군모를 쓰고 어머니께 인사드릴 때 나도 그 옆에 있었는데 군모가 너무 커서 작은오빠 눈썹까지 가리워진 모습과 어머니의 슬퍼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실향민인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잠시 소개하려고 한다. 북녘땅 평안북도 신의주 근처 한 시골마을의 면장이시며 마을의 송사를 맡으셨을 뿐 아니라 지주이시기도 하셨던 아버지와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던 어머니 사이에 난 4남3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사실은 필자가 11번째 아이였는데 내 위의 네 아이들은 유아시 사망했다고 한다.
단란했던 우리 가정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계기는 지주들의 농토와 집, 모든 재산을 빼앗아 소작민들에게 무상분배한다고 주장한 ‘토지개혁’ 이었다. 무상분배라고 하지만 농민에겐 토지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 주어졌고 매매, 임대등은 엄하게 금지되었다. 김일성이 공산당 정권을 잡자마자 제일 먼저 실시한 것이 토지 개혁이다. 이 토지개혁으로 우리 가족은 모든 것을 다 뺏기고 1948년 필자가 3살때 우리 부모님은 결혼하지 않은 자녀들을 대동하고 남부여대하여 큰오빠가 계시는 남한으로 피난나온 실향민 가족이다.
학도병으로 입대한 작은 오빠는 다른 학도병들과 같이 간단한 총쏘는 법을 배우고 바로 포항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전선으로 배치되기 전 갑자기 심한 복통으로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는 작은 오빠를 목격한 의무장교가 “넌 이런 상태로 전선에 배치되면 죽는다. 후방에 남아 나를 도와라” 해 의무병으로 남게 되었다고 했다.
갑작스런 복통 때문에 작은 오빠는 죽음에서 살아남게 되었고 하루를 살아도 졸병보다는 지휘관이 되고 싶어 6개월간의 장교 교육을 받고 그 당시 앞장서서 지휘하다 하룻만에 전사하는 일이 허다한 ‘하루살이 소위’로 임관하여 전선에서, 또 지리산에서 빨치산 토벌 작전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워 훈장도 받았으나 작전중 높은 바위에서 추락, 나뭇가지에 걸려 간신히 죽음은 면했으나 큰 부상을 입고 육군 대위로 명예 제대하셨다.
몸이 회복되신 후 대학에 진학, 법을 전공하셨고 졸업하신 후 전주 사범학교에서 교련 및 사회교사로 잠시 교편생활을 하셨다. 난 그때 국민학교 5학년이었고 사범학교 제자였던 분이 나의 담임 선생님이 되셔서 선생님이 가끔 작은 오빠를 초청하여 우리들에게 6.25 전쟁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실 기회를 드렸는데 부상 후유증으로 몸이 약하신 작은 오빠였지만 전쟁담을 들으면서 오빠에 대한 자부심으로 친구들 앞에서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많은 전쟁담을 들었지만 한가지만 소개하려고 한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어느 초겨울 날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에 인민군한테 오빠의 소대가 포위되어 인민군 장교가 일렬로 서라고 명령하여 모두가 일렬로 서니 인민장교의 사격 지시와 함께 따발총이 쏴지기 시작, 중간에 서있던 작은 오빠는 갑자기 양말을 신었던 발목이 너무 가려워 긁으려고 허리를 숙이는 순간 총알이 스쳐 지나가 그 자리에 엎드려 죽은 체 하고 있는데 주위가 조용해 살짝 일어나보니 자기 혼자 살아 남아 있었다고 했다.
이런 비슷한 죽음 직전의 상황을 여러 번 겪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모두 주야로 간절히 기도하셨던 우리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누누이 말씀하시곤 했다.
끝으로 우리 작은 오빠처럼 젊은 청춘을 조국을 위하여 헌신하신 6.25 참전 한국 용사님들과 미국을 비롯한 15개국 외국 참전 용사님들의 헌신과 봉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부강한 대한민국이 있었음을 젊은 세대에게 상기시켜 주며 진심으로 이분들께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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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스터 라우든 카운티 공립학교 전직 교사 애쉬번,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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