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는 봄이면 보잘것없는 작은 꽃을 피운다. 화려하지 않아서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작은 꽃이 밀려난 자리마다 씨앗이 맺힌다. 씨앗은 여름의 뜨거운 햇볕과 바람을 고스란히 이겨낸다. 비에 젖고, 폭염에 메마르고, 때로는 벌레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버티는 시간이 결국 대추의 속살을 채우고 가을에야 비로소 붉게 물든다. 열매의 붉음은 결코 단순한 색깔이 아니다. 견디고 버티어 하늘과 땅과 함께 빚어낸 결실의 색깔이다. 대추는 이제 가을 바람과 함께 모두 헤어져 어디론가 간다. “대추를 보고도 안 먹으면 늙는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한 알씩 깨물어 먹는 누군가와 만난다.
올해도 장로님이 대추 한 박스를 나누어 주셨다. 금년에는 유독 많은 대추가 열렸다. 따기가 어려워 두꺼운 헝겊을 씌우고 막대기로 때렸다. 열매를 쪼아먹는 새떼를 감당할 수 가 없어 공기총을 사용하셨다. “에그머니나 살생을 하셨네요” 말하며 웃었다. 새는 수일이 지나면 다시 와서 대추를 쪼기 시작한다. 그렇게 상처 입은 것을 많이 골라냈다. 장로님의 굵은 손마디 마다 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단단하고 정직했다. 땅을 고르고, 물을 주고 가지를 솎아 내셨다. 대추 한 알 한 알에 마음을 담으며 그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셨을 것이다. 장로님이 나누어 주신 것은 대추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세월의 인내와 감사와 나눔의 기쁨이었다. 단순한 열매가 아니라 땅을 사랑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대추는 장로님 손끝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온은 높고 날은 더운데 누군가와 나누어 먹을 행복감으로 빠른 손이 움직인다.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대추는 다양한 얼굴로 내게 왔다. 아직 씨도 품지 못한 채 무리와 함께 떨어져 내린 작은 것, 손가락만큼 커다랗게 자라 제 몫을 하는 대추, 알맞게 썬텐한 것도 있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하현달 닮은 작은 잎새 하나 달려 정겹게 웃고 있다. 어떤 대추는 짙은 갈색과 녹색이 반반이다. 여장 남장을 반반씩 하고 노래하는 가수가 생각났다. 어떤 것은 매끈하고 붉은 빛이 고르다. 대추 알은 크기가 다른 채로 잘 어우러져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다 각각이듯 대추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대추나무 하나가 다 온 것 같았다. 큰 양푼에 대추를 쏟아내어 깨끗이 씻은 후 물기를 닦았다. 성가대원의 숫자대로 작은 비닐 팩에 담아서 주일에 나누었다. 나누는 얼굴에 미소가 따뜻했다. 작은 열매가 기쁨을 주었다. 한 해의 결실을 이웃과 나누는 손길이 귀하고 감사했다.
오래 견뎌온 시간 속에서 얻은 대추의 단맛과 깊이가 입안에 퍼진다. 사람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쌓은 경험이 언젠가는 인생의 맛이 되어 전해진다. 나는 대추가 견뎌온 계절을 떠올리며 사람의 삶도 이와 닮았음을 깨닫는다. 누구는 아직 삶의 씨앗을 품지 못해 어리고, 누구는 묵묵히 세월을 채운 듯 깊다. 매끈한 이도 있지만 주름과 흔적을 안고 사는 이도 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맛 곧 삶의 진실이다. 각자의 속도와 흔적은 다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견디고 익어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맛과 빛을 찾아 나눈다는 것을 배운다.
<
조형숙 시인·수필가 미주문협 총무이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