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일인 Valentine’s Day 즈음엔 아버지의 애모(哀慕)로 더 마음이 아프다.
우리 형제들은 할머니랑 같이 살았어도 할아버지는 대면 못했다. 성악가인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오페라단장이셨다고 국교단절 후 귀국 못하신 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셨으니까.
자연 아버지의 성장기는 어머니와 단 둘이 신산(辛酸)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전차비가 없어 서대문에서 영천달동네 집까지 도보로 통학하셨다니까. 일테면 아버지는 결핍된 부정(父情)과 지난(至難)한 환경을 극복, 자수성가하신 셈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온유하고 한 없이 따스하게 우리에게 안온(安穩)한 환경을 조성해주셨다. 맞벌이 하셨던 엄마랑 늘 원만한 잉꼬부부셨고. 우리들에게 인상을 쓰시거나 화내고 소리치신 적이 없다.
단 한번도. 야단치는 대신 손드는 벌을 주셨던 일은 한 번 있다. 초등 5학년 때, 학교 애들한테 배운 “기집애”란 소리를 했다가 동생과 함께 받은 체벌이다. 말조심과 욕, 거짓말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걸 그때 습득했다.
지금도 회상되는 아버지의 모습중 하나가, 퇴근 후 우선 현관에 어질러진 9식구의 신발들을 짝 맞춰 가지런히 놓으시던 거다. 잔소리를 하실 만도 한데 묵묵히 일상의 습관인양 그러셨다.
퇴근길엔 호떡, 군밤, 군고구마, 땅콩, 빵들을 번갈아 사들고 오셨다. 우린 새의 새끼들 마냥 아버지의 귀가를 더 고대했고, 아마도 아버지가 옛적 하교 길에 그렇게 먹고 싶던 호떡을 끝내 못 드셨다더니, 그게 상처로 남으셨던가 싶다.
또 대식구들을 인솔, 바다구경 삼아 인천 작약도 외에, 도봉산, 덕소, 팔당, 송추, 장흥, 강촌까지 철따라 산과 강으로 안내하셨다. 자가용은 언감생심이던 60년대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인제야 가늠된다.
사무치게 그리운 나만의 추억도 많다. 일기예보도 부정확할 때라 비 오면 우산 들고 합승정류장으로 아버지 마중을 나갔다. 빗소리와 와글와글 개구리들의 합주를 벗 삼아 두근두근 아버지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큰 기쁨이었으니까.
운동경기 관전도 좋아하셔서 스포츠를 좋아하던 나를 합류시키셨다. 그래서 1963년 장충체육관이 완공되자 열린 한일여자농구경기 후, 승리의 희열로 열띤 인파들에 휩싸여 부모님과 걸어 내려오던 그 밤의 열기는 지금도 느껴진다.
유명한 외화도 두 분만 가시지 않고 대학생이던 내게 동참을 권유하셨다. 내 정서적감성형성의 8할은 아버지 공이다. 우리들에게 입력된 문화생활감각증진은 늘 아버지의 그림자 덕이고.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아버지를 무서워하거나 마음졸여본 적 없는 분위기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온실의 꽃인 양 성숙하게 해주신 거다. 가장의 폭언, 폭력에 시달린 사람도 많다지만 간접적인 매체를 통해 터득, 실감을 못했기에. 우리가 각 가정을 이뤄 삶의 세파와 애들 훈육을 경험하며 비로소 부모님의 훌륭하신 인격을 절절히 인지했다.
심리학의 회고절정(Reminiscence Bump)이란 개념은 ‘누구나 인생전체 통 틀어 10대시절의 기억을 가장 생생히 떠올리는 현상”을 말한다. 돌아보니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할머니와 부모님의 사랑우산 아래서 누렸던 보석 같은 추억들! 그 시절이 바로 천국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아버지를 언 땅 아래 눈물로 모신 다음, 산을 내려와 육개장을 먹었으니... 동생과 나는 “어떻게 그때 음식이 넘어갔지? 괴물 아니냐?” 그래서 더 죄송하다”며 울먹이곤 한다. 그래도 안다. 아버지께선 하늘에서도 계속 지켜봐줄 테니 내 사랑을 동력삼아 잘 살라는 염원으로 발렌타인 데이에 떠나셨다는 걸...
푸시킨도 지나간 것은 큰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했지만, 세월이 흐르니 아버지의 그리움과 사랑, 경외가 더 크게 다가온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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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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