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찾아오면 세상은 자연스럽게 변한다. 헐벗었던 나뭇가지에는 다시 새싹이 돋고, 얼어붙은 듯 스산했던 풍경에도 서서히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아무리 추웠던 겨울도 때가 되면 기지개를 켜듯 긴 잠에서 깨어나 봄을 맞이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자연처럼 그리 쉽게 순리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물론 긴 시련의 시간을 지나 다시 일어서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은 그 시간 속에 멈춘 채 살아간다. 무언가를 시작하려다가도 현실의 벽 앞에서 포기하고 돌아서기도 하고, 꿈을 향해 도전하려다가도 불확실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머뭇거리기도 한다. 마치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체념한 사람처럼 스스로 긴 겨울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는 시간과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끝내 자신의 봄을 맞이한 이들에게 깊은 존경을 보내게 되는지도 모른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그런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었다. 그는 교향곡 1번의 처참한 실패 이후 깊은 절망에 빠졌고, 한동안 작곡조차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 위대한 낭만주의 작곡가로 기억하지만, 그 역시 무너지고 흔들리던 한 인간이었다. 물론 주변의 도움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긴 침묵과 어둠 속에서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자기 자신을 놓지 않으려 했던 그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교향곡 2번이다.
얼마 전 LA 필하모닉의 연주를 들었다. 최근 몇 년간 LA필은 현대음악과 실험적 프로그램뿐 아니라, 다양성과 디아스포라, 사회적 포용, 그리고 현대 사회 속에서 예술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들을 꾸준히 무대 위에 올려 왔다. 클래식 음악 역시 더 이상 과거의 유산만을 반복하는 예술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되는 예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 그리고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음악까지 함께 품어낼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LA 필이 가진 가장 큰 저력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을 직접적으로 움직이고 위로해 주는 익숙한 음악 또한 원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무대에 오른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은 더욱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은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다고 느낄 만큼 익숙한 선율들로 지금까지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디즈니홀의 우아한 음향과도 잘 어울리고, 영화음악에 익숙한 LA 관객들의 감수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무엇보다 이 음악은 억지로 감동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대신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는 평온함과 따뜻함을 조용히 끌어내 준다.
하지만 처음부터 청중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런 음악은 아니다. 특히 1악장과 2악장은 어딘가 흐릿하고 혼란스럽다. 감정은 쉽게 정리되지 않고, 선율은 계속 맴도는 듯 알 수 없는 혼돈과 안타까움이 이어진다. 듣고 나서도 선명하게 남는 장면은 많지 않다. 마치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이 그렇듯 무엇이 그렇게 괴로웠는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길고 어두운 시간이었다는 기억만 남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곡은 그 혼란과 방황을 지나며 조금씩 변해 간다. 그리고 마침내 3악장의 따뜻한 선율과 마지막 악장의 환한 에너지에 이르면, 긴 겨울 끝에 다시 살아가고 싶어지는 마음을 들려준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 음악을 사랑하는 것인지 모른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완벽한 사람의 음악이 아니다.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오래 흔들리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음악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지휘자 로렌조 비오티가 LA 필 데뷔 무대에서 바로 이 작품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미 너무나 유명한 명곡은 오히려 더 어렵다. 아주 잘해도 본전이고,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었다간 두고두고 후회될 선곡이다. 그럼에도 비오티는 이 곡을 단순히 화려한 낭만주의 음악으로 몰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작품 안에 숨어 있는 인간적인 흔들림과 긴 호흡을 차분히 끌어냈고, 끝내 그 모든 방황이 따뜻한 희망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젊은 지휘자답지 않은 침착함과 절제된 호흡이 인상적이었다.
봄은 저절로 오는 계절이 아니라, 긴 시간을 버텨낸 사람만이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은 긴 겨울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는 우리들에게 조용히 용기와 위로를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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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아 문화 칼럼니스트·YASMA7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