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되니 곳곳에서 졸업식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다 일 년 전에 나눈 친구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느지막이 장가간 친구의 딸이 조기유학을 와서 올해 대학을 졸업하는데 우리가 졸업식에 참석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한국에서 딸 졸업식에 올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선후배의 개념이 없는 미국이긴 하지만 공교롭게도 친구 딸이 남편의 50여 년 대학 후배가 되는 셈이다. 이곳에서 세 번의 아이들 졸업식과 두 번의 내 졸업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긴 했지만, 이제 18년 만에 그야말로 꿈과 젊음으로 가득한 광장에 들어서는 것이다.
처음엔 캠퍼스에 펼쳐진 초록의 방석 위에 무질서하게 자리 잡은 젊은 그들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나와는 전혀 무관한 먼 거리에 있는 듯했다. 나에게도 한때 교정의 주인이었던 적이 있었고 이젠 여러분 차례라고 그들 나름대로의 역할을 인정해 주는 자세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니 지나치는 학생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묻어나는 여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도전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도 점차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부러워하며 동시에 젊음의 향연 뒤에 숨겨진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알아채게 된다. 지금처럼 무자비할 정도로 경쟁이 심한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는 나를 다행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대학 졸업반이면 갖는 심리적인 불균형을 개성과 열정으로 되살릴 수 있는 젊음이 있다.
가족 중 처음으로 학사학위를 받는 사람은 일어나 보라는 총장님의 말에 100여명의 승리자가 자리에 우뚝 선다. 그들을 응원하는 끊이지 않는 박수가 졸업식장을 영광의 장소로 바꿔 놓는다. 천여 명의 졸업생 이름이 불려질 적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가족과 친지들의 함성이 졸업식장을 구름처럼 두둥둥 떠다니며 에워싼다.
출렁이는 젊음의 열기 속에서 쏟아지는 긍정적인 에너지는 식었던 몸과 마음을 뜨겁게 하고 어둠에 묻혀있던 희망의 싹을 자라게 해 준다. 온 몸에 스며드는 그들의 열기가 일상에 젖은 무력감을 확 쓸어낸다.
집에 돌아오니 허리케인 Doug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우리 가족은 독일에 사는 아들 둥이를 허리케인 Doug이라 부른다.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려진 꼴을 못 참는 성격이어서 투덜거리면서도 결국은 정리 정돈에 앞서는 성격에서 얻은 별명이다. 그러니 둥이가 방문하기 전의 냉장고 청소와 옷장정리는 나의 큰 숙제다.
이번에도 둥이가 떠난 후 창고방을 여니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가 일렬로 키재기 하듯 서 있다. 재활용 쇼핑백들은 겹겹이 포개어 쌓아 놓은 러시아 인형처럼 얌전히 제자리에 놓여있다. 이렇듯 착한 허리케인 Doug이 떠나고 나면 남편과 나는 첫 일주일을 축 처져 보낸다. 정리정돈된 방보다도 그의 부산함이, 어설픈 한국어가, 상상 저편의 아이디어가, 특히 그가 남기고 간 젊음의 흔적이 그립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스스로 자리를 잡아가면, 아이들 다 소용없고 그래도 당신과 나뿐이라며 남편과 둘만의 무심함 속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라도 거침없는 웃음이 있는 곳, 기대할 꿈을 꾸는 자들이 있는 곳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겠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있었던 젊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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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레지나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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