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방학중이라 거의 묵언으로 지낸다. 말없음이 지극히 자연스런 일상에 묻혀 사노라면 간혹 사람들 사이(人間)의 섞임이 그리워진다. 2002년 임오(壬午)의 양력설을 필두로 몇 차례 사람모임을 치뤘건만 채 열흘도 못돼 벌써 목구녕이 칼칼하고 정념(情念)이 끊어 오른다. 그래도 길고 지속된 정적은 미상불 소스라치게 매서운 스승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새해 둘쨋 주를 맞는 요사이 북가주 겨울 아침안개가 참으로 대단하다. 사위가 온통 뿌옇게 짙은 습기로 드리워진 아직 컴컴한 이른 새벽 종종걸음쳐 혼자 동네 골프장으로 향한다. 그저 뿌연 공중으로 첫 티샷을 때려내고 질퍽한 대지를 조심스런 홀로 걷기 명상으로 천천히 지쳐나간다.
페어웨이 오른쪽으로 제법 커다란 인공호수에선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이 목욕하는 듯 따스한 아지랑이가 한껏 일고있다. 아, 참으로 절경이다. 절로 감사의 기도가 인다. 나도 모르게 위 아래 그리고 동서남북 사위에 지금 여기 살아있음의 경외를 전한다. 이토록 장엄한 고요가 우릴 축복하고 있다니! 인적이 거의 끊긴 새벽 골프장 인공호수 주위에 옹기종기 모인 오리떼들도 모두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보다 큰 깨어남을 도모하고 있다. 홀로 맞는 새벽의 고요가 불현듯 태고(太古)의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
이른 새벽, 항상 깨어 있는 성자가 강가에 앉아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 솔가지 사이로 부는 바람, 새벽을 맞는 새들의 지저귐.....
그때 어떤 학식 높은 나그네가 와서 물었다. "당신 철학의 핵심을 단 한 마디로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성자는 침묵을 지켰다. 마치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 같았다. 나그네가 말했다. "혹시 귀가 먹었습니까?" 성자가 말했다. "그대의 질문은 들었다. 그리고 이미 대답했다. 침묵이 바로 그 대답이다. 그 침묵의 틈, 그 정적이 바로 내 대답이다."
나그네가 말했다. "수수께끼같은 답변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좀더 분명하게 말해 주십시오." 그러자 성자는 눈을 지긋이 감으며 모래위에 「명상」이라고 아주 작은 글씨를 썼다. "이젠 읽을 순 있으니 처음보단 좀 낫군요. 최소한 뭔가 생각할 꺼리라도 생겼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순 없겠습니까?"
나그네가 계속 다그치자 성자는 다시 「명상」이라고 썼다. 이번엔 좀 큰 글씨였다. 나그네는 좀 당혹스럽고 어리둥절했다. 어째 놀림을 당하는 것 같기도 해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글씨만 조금 클 뿐 다른게 없지 않습니까? 좀 더 분명하게 밝혀 주십시오!" 성자는 다시 아주 큰 글씨로 「명상」이라고 썼다. 나그네가 발끈했다. "혹시 당신은 실성한 게 아
닙니까?"
게슴츠레 눈을 반쯤 뜬 성자가 말했다. "나는 이미 많이 실망했다. 처음의 내 대답은 옳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대답은 그 만큼 옳지 았았으며, 세 번째 대답은 더 엉터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네 번째 대답은 완전히 잘못 되었다." 성자는 모래 위에 써놓았던 글씨를 모두 지우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첫 번째 대답을 들으라. 내가 진실했던 때는 오직 침묵의 순간뿐이다."
새벽 안개속의 고요가 불현 듯 어떤 명확성을 선사한다. 침묵과 고요는 깨어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사람들과 부대낄 땐 완전히 깨어있기 힘들다. 두루 섞이다 홀로 침잠하면 뇌성같은 고요함이 깨어남의 장(場)을 가져다 준다. 「침묵의 틈」을 비집고 들기란 어마어마한 수행이요 처절한 무도(武道)다.
이제 곧 봄학기가 시작되면 또 무수한 학생들과 교류하게 된다. 며칠씩 묵언으로 지낼 수 없는 생활로 되돌아 간다. 그래도 새벽은 항상 침묵과 정적을 곱배기로 엮어 낼 수 있는 나만의 시공(時空)이다. 칼칼한 목과 들끓는 정념이 간간히 일더라도 올해 말띠해엔 기필코 피안에 다다를 적토마 「샴발라(Shambala)」의 기개를 하루 하루 새벽마다 되새길 작정이다. 침묵 그리고 그 사이로 야생마의 비상을 꿈꾸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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