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데뷔…‘로마의 휴일’등 출연
평생‘행동하는 배우’로 존경 받아
지난 11일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그레고리 펙은 영화속의 정의롭고 올곧은 이미지를 현실의 삶 속에 그대로 투영시킨 ‘행동하는 배우’였다.
1962년 그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겨준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에서 백인여성을 강간한 남부의 흑인 강간범을 변호하는 애티커스 핀치 역을 맡아 빼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던 펙은 미영화과학아카데미와 미암협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전국예술기금을 위해 헌신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스타파워를 앞세워 진보적 이념에 매진한 그가 골수 보수주의자인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눈밖에 나 정적 명단에 이름이 올랐던 것은 영화계에선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그는 1916년 4월5일 캘리포니아의 라 욜라에서 엘드레드 그레고리 펙으로 태어났다. 여섯 살때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펙은 LA의 카톨릭계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버클리대에 입학, 영어를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으로 건너가 이런 저런 잡일을 전전하던 펙은 엠린 윌리엄스의 연극 ‘모닝 스타’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돼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면서 본격적인 연예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1944년 ‘영광의 날들’로 은막에 데뷔한 그는 ‘왕국의 열쇠’ 알프레드 히치콕크의 ‘스펠 바운드’ 등에 출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으며 1953년 ‘로마의 휴일’로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무려 다섯 차례나 아카데미상 후보추천을 받았던 그는 주변으로부터 정계진출을 권유받았으나 “정치는 내 관심분야가 아니다”며 끝내 제자리를 지켰다.
세 아들을 낳아준 그레타 펙과 이혼한 후 1954년 파리의 여기자 베로니크 파사니와 재혼한 그는 슬하에 두 자녀 앤소니와 세실리아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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