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과 미국생활이 안정되어 가던 40대 여성이 상담을 청해온 적이 있었다. 이 여인은 혼전 시절의 복잡했던 과거를 남편에게 고백하고 용서받겠다고 했다. 왜 이런 고백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부터 던져 봐야 했다. 일단은 고백을 보류하고 계속 상담 받기로 약속했지만, 이 여인은 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편에게 고백하고야 말았다. 죄를 고백하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지만, 그 이후 남편과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어 졌고, 남편도 아내의 정직함을 칭찬하기는커녕, 아내의 과거에 대해서 불편해 했다.
“이런 일은 가슴속에 간직하고, 대신 그 만큼 남편과 가족들에게 헌신하며 살고, 그 만큼 실수하는 다른 사람들도 용서하고, 도와주고 이해하며 살라” 충고했었지만 이 여인은 고백하고 벌을 받는 것이 더 편했는지도 모른다.
양심의 가책은 가슴속의 빚으로 삼아야지 그것을 꺼내는 순간, 자신과 주위 사람에게 많은 문제를 가져온다. 이 상담을 통해서 나는 “양심의 위치는 가슴속이다”라는 교훈을 배웠다.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의 주인공 목사는 6.25때 납북을 당했다. 모두 순교했는데 살아서 돌아온 목사는 둘, 하나는 정신이상이 되었고, 또 한사람, 주인공 목사는 맑은 정신이었다.
공산당이 살려준 목사들은 미쳤거나 신앙을 저버리고 배신했으리라는 가정 하에 교인들이 그를 핍박했다.
실은 그 반대였다. 신앙을 저버리고, 목숨만 살려주면 공산당에라도 협조하겠다는 목사들은 다 처형당하고, 정신이상이 된 목사와 주인공 목사, 끝까지 자신의 신앙양심을 지키던 목사만 살아서 돌아왔다.
이런 사실을 고백하고 싶었으리라. 요즈음 같았으면 벌써 양심선언을 하거나 진실을 밝혀서 교인들의 알권리를 충족 시켰어야 했는데, 그는 끝까지 진실도 밝히지 않고 핍박을 받으며 살아간다. 양심선언도 진실규명도 없는 이 주인공 목사의 삶이 독자들에게 더 빛나는 이유는 바로 그가 양심을 간직하고 진실하게 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자정 할 수 있는 능력을, 즉 양심을 심어준 것이 바로 창조주의 뜻인 것 같다. 가슴속 깊이 숨어서 자정기능을 해야할 양심을 가슴 밖으로 끌어내어 선언을 하면, 즉 산소를 쐬면, 자정능력은 없어지고, 산화작용을 거쳐서 양심에 녹이 슬게 마련이다.
양심 고백이나 양심 선언의 형태를 빌어서 떠들어대는 한순간은 그럴듯해 보이고, 마음이 후련할지 몰라도 양심의 근본 기능인 자정능력을 잃게 된다.
한마디로 양심은 선언용이 아니다. 양심 선언 후에 여러 행태로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기도 하는 이유가 바로 양심의 용도를 틀리게 쓰고 위치를 변경 시켰기 때문이다.
정략용으로, 공격용 혹은 배신용으로 용도 변경을 한 양심선언은 많이 들어왔는데, 이제는 병역기피용 양심까지도 등장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동 연배의 남들은 꽃다운 청춘과 목숨을 바쳐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데 자신은 징집에조차 응하지 않겠다는 양심에 ‘감명(?)’받아서 무죄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법철학과 법 해석에 놀랄 뿐이다.
더욱 놀랄 일은 아마도 이런 판결에 찬성하는 산화된(녹슨) 양심 소유자도 제법 많다는 소식이다. 양심에 근거했다는 위법, 탈법, 불법행위가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양심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사회가 될 것이다.
양심과 범죄는 분리해야 한다. 양심 병역면제/기피 사건을 보며, 진정 순수한 양심 소유자는 ‘양심 면책 특권’보다는 양심 갈등의 십자가를 선택할 것이라 믿는다.
정균희/UCLA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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