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6.25동란 당시 대전을 거쳐 대구로 피난을 간 초등학교 5학년의 나는 피난살이 어려운 생활에 우선 먹을거리도 벌어야겠다는 초조한 심정에 판때기를 주어다가 구두닦이 통을 만들어 어깨에 메고 대구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나간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터주대감이 무서운 줄을 거기에서 배웠다. 남의 구역을 침범했다고 여러 명의 구두닦이 터주로부터 늘씬하게 맞았다. 법에도 없는 터주들의 권리, 그러나 터주들의 횡포는 엄연히 있었다.
이 땅에서는 백인들이 터주대감인 셈이다. 이 터주대감들이 이민정책을 세워놓고 이민을 받아들이자고 했을 때에는 우선 자국에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부족, 빈곤한 다민족 문화 창출, 고급 두뇌의 수입 등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한국의 국내 사정과 생활경제의 불안, 밝아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봇짐을 싸들고 이민 길에 나섰던 이민 1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정신 없이 살았다. 편안하게 자라난 아이들은 왜 우리 부모가 피난민처럼 정신 없이 살았는지 다 커서야 한 구석을 이해하면서 부모의 등을 쓰다듬어 준다.
그래, 피난민! 6.25 동란을 겪은 이민 1세들은 고난과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 인생은 전쟁, 그 때 겪은 어려움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또 다른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는 강한 힘을 저축해 두었지! 그런 경험은 이민이란 새 생활의 터전을 닦는 데에 어떠한 보약보다도 힘이 되었지.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잔소리, 등뒤에서 떠드는 소리, 돌아가라는 소리, 다는 아니지만 반이민 쪽을 옹호하는 소수의 백인들은 고약한 터주대감 노릇을 한다. 저희들은 입국비자도 없이 배를 타고 쳐들어와 무력으로 원주민을 밀어내고 이 땅에서 정착한 불법이민자들이 아니었는가?
영국의 법전을 빌려다가 미국의 헌법을 기초한 저희들이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이 땅에 왔다고 늦게 온 이민자들에게 터주대감 노릇을 톡톡히 하려 든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아직은 저들이 모든 것을 쥐고 있는데, 죄라면 한 발 늦게 이 땅에 온 죄 뿐인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잔소리가 심해진다. 그래, 시작이 땅이며 끝도 땅이지.
먹는 것이 모두 땅에서 나고 땅에서 난 것을 먹다가 죽으면 보답하는 마음을 싸 가지고 땅으로 가지. 너도 가고 나도 가는 이 세월에 주인이 어디 있으며 나그네가 따로 어디 있겠는가. 마음을 다스리니 천지의 터주대감이 또한 나인 것을!
김윤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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