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란’이라고도 하고 ‘사변’이라고도 하고 ‘한국전쟁’이라고도 하는 동족상잔의 난리가 1950년 6월25일 새벽에 일어났다. 3년간 이어진 전쟁 중에 얼마나 많은 형제의 피와 무고한 유엔군의 피가 이 땅을 적셨는가? 한 맺힌 분단도, 두려운 파괴도, 북한을 향한 증오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도 반세기가 지나다보니 잊혀지는 건가? 당한 자와 목격했던 자들이 54년의 긴 세월을 보낸 이제는 한 맺힌 눈물이 속으로만 흐르는 것 같다.
끼어 앉으면 10여명 정도 탈 수 있는 상자 곽 같은 것을 말이 끌고 다니는 마차와, 일본사람이 버리고 간 전차가 가끔 다니는 것이 대중교통인 느릿한 부산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친 피난민들이다. 배가 고프고 몸이 아픈 사람들이었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 때문에 마음이 더 아픈 사람들이었다. 오늘밤 어디서 몸을 누이고 무엇을 먹을지 모르는 막연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큰오빠 집에는 세 가구가 방 하나에 한가족씩 들어왔다. 서울서 시집온 언니의 친척들이다. 연고자가 있어서 다행인 사람들이었다. 전쟁을 겪지 않은 것이 미안한 언니와 오빠는 피난 온 친척들과 정말 조용히 잘 살았다.
사람, 사람, 사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다.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전쟁의 공포와 막연한 두려움이 날마다 더해갔다. 북쪽 군대가 낙동강까지 내려와서 남은 곳이 이곳 부산뿐이라고 했다. 대통령도, 부통령도 임시수도도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부산에서 북쪽으로 두어 시간(50년대의 교통으로) 올라간 온천동에 우리 집이 있었다.
일본사람의 별장이었던 방이 많은 우리 집이 부통령의 임시 숙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짐들을 정원 끝에 있는 창고에 넣어두고, 피난민들처럼 옷가지만 가지고 나라에서 구해 준 작은 집으로 옮겼다. 감나무와 딸기밭에 붙은 집이었다.
결핵을 앓고 있던 셋째 오빠와 어머니는 수원지 부근 공기 깨끗한 곳으로 옮겼고, 중·고등학생이었던 언니와 오빠는 부산으로 가고, 두 동생과 나는 아버지와 일하는 할머니와 함께 피난민 생활을 했다. 난리 통에 우리도 잠깐 이산가족이 되어 살았다.
크고 좋은 적산가옥에 살면서 늘 부끄럽고 빚진 것 같이 무거웠던 마음이 편안해졌던 시절이었다. 햇빛 따뜻한 툇마루와 채송화가 피어 있던 하얀 마당과 톡톡거리며 틀어지던 감꽃이, 밝은 달빛이 지금까지 내게 참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준다.
이 세상에 죽이고 죽는 싸움이 없었으면 좋겠다. 어떤 모양의 전쟁도 어떤 이유의 전쟁도 나는 정말 싫다.
김옥수/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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